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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Mar 08. 2017

지하철을 기다리며


적당히 쓸쓸한 날엔 혜화역으로 간다.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우울한 날엔, 지나간 옛 노래처럼 덜컹거리며, 스스로에게 위로를 건네며 간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친절한 안내방송을 듣는다. 스피커를 통해 전달되는, 또박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같은 문장만을 반복하는 소리들이 외롭다. 그 목소리들은, 차창 밖 차가운 어둠을 닮은 물결 속으로 자주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외로운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둠 속에 빛나던 전철의 창들은 섬과도 같았다. 내려야 할 곳이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차마 출구를 알 수 없어 그 어디에도 닿지 못하는 외로움을 품고, 기다란 슬픔들은 빠르게 간다. 수많은 외로움을 품어내기 위해, 슬픔은 단단한 표피를 지녔다.



거리는 일정한 간격마다 정해진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그 사이로 누군가는 표를 끊고, 누군가는 지하철을 탔으며, 누군가는 총총걸음으로 빠져나갔다. 재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이정표들. 나는 복잡한 지하철 노선도를 읽는다. 2호선과 4호선, 9호선, 분당선. 초록과 주황과 빨강, 보라와 연두, 노랑으로 복잡한 노선도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자주 어두워지는 삶의 이정표가 곧잘 읽히지 않듯, 내 사랑도 곧잘 눈먼 사랑이었다. 그러나 전철 안은 늘 환하기만 했다. 지하철에서 절연구간이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더듬더듬, 내 슬픔이 내릴 곳을 찾는다. 사당, 이수, 동작, 이촌, 삼각지, 서울역, 회현, 명동, 충무로,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동대문. 종착역은 언제나 짧은 듯 멀었고, 환승역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때때로 가벼울 때도 있었으나, 무거운 날들이 더 많았던 날, 눈비 오는 날이면, 내 우울들 우산 하나로 다 가리지 못해 젖은 어깨로 서서 간다. 혹은 늦은 오후 3시의 햇살들이, 앉거나 서서, 손잡이에 제 몸뚱이를 올려놓고 잘게 흔들리는 모습들을 본다. 이따금은 선반 위로, 촘촘한 기억들로 가득 찬 지난 사랑들을 올려놓고 급히 내리곤 했다. 어쩌면 오늘도 선반 위에 누군가의 지난 사랑이 올려져 있을 것이다. 유실물들에는 곧잘 이름이 없었다. 놓아져 버린다는 것은 이름을 지운다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이미 누군가로부터 지워진 이름들을 품은 채, 여전히 변변치 않은 내 삶의 변두리를 향해, 간다.


칸칸이 나누어진 출입구에서 저절로 개폐되는 슬픔들을 보라. 슬픔들은 저마다의 얼굴을 지녔다. 오늘 나의 슬픔은 어떤 얼굴인가. 나는 나의 얼굴을 모른 채 지하에서 지상으로 가는 층계를 걷는다. 등 뒤로 길게 드리운 길들이, 오래 따라온 거리들이, 이정표들이, 천천히, 추락하고 있었다.



오늘은 오래간만에 들린 대학로, 지붕이 낮고 오래된 의자가 놓인 어느 술집에서 내 오래된 지인들과 밤이 기울도록 취해져 갈 것이다. 그렇게 나는 혜화에서 쓸쓸함을 망각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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