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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Mar 12. 2017

다시 봄이 오다


#1. 

언젠가, 이 거리가 참으로 뒤숭숭했다고,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시장에서 돌아오던 종종걸음 위로, 날카로운 비보들이 날아왔고, 거리는 불온한 침묵으로 가득 찼고, 노란 은행잎들로 세상이 뒤덮였던, 혹은 뒤집혔던 어느 늦은 10월, 대통령이 사살당했다고 했다. 종종 할머니의 긴 한숨과 함께 자주 전해 들었던- 위태로웠던 새벽에 대한 이야기는, 낯설었고, 내게 세상에 대한 냉혹함을 일깨워주었다. 부당함을 탐했던 권력의 종말이 가져온 비극적인 엔딩 속에 숨은 엄정하고도 냉정한 인과응보에 전율이 일었던 것은, 그보다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2.

먼 친척 형이 새벽 서너 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급히 찾아와 몸을 숨겼다가 떠났다고,라고 어머니는 낮게 속삭였다. 그 당시 그는 다니고 있던 대학의 총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88올림픽이 열리기도 했던 그때, 그는 경찰에 쫓기는 몸을 서둘러 숨겨야 했다. 어머니는 자다가 깨어 졸린 눈으로 눈을 비비는 내게, 낮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얘야, 우리 집에는 누구도 오지 않았단다. 누가 묻거든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말해야 하는 거야.”


지켜야 되는 ‘비밀’이란, 그렇게,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고도 없이, 급작스럽게 다가왔다. 왜 그가 그렇게 쫓겨 다녀야 하는 건지, 학생운동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나는, 그저 긴장감 어린 어머니의 표정에서, 그 절박하던 목소리에서, ‘어른’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세계의, 냉혹함을 엿본 것만 같아, 잠에서 덜 깬 눈으로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다시 눈 뜬 아침에는 더 이상 구겨진 낯선 운동화를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오랫동안, 그날, 그 새벽의 비밀은 어린 나를 맴돌았다.

  

#3.

다시, 2017년. 3월. 유난히 추웠던 겨울에서 봄으로 건너가고 있는 이 시점. 나는, 오래전에 할머니로부터 종종 들어왔던 이야기를, 그리고 어느 아침, 급박하고 낮게 전해져 오던 어머니의 말을, 새벽바람을 몸에 묻힌 채 급히 떠나갔다는 먼 친척 형을 떠올렸다. 그 절박함을, 그 속에 숨어 있던, 낮고 은밀하게 웅크려 있던 희망들을, 비로소 나는 보았다. 이제는 커다랗게 피어나는 새봄을, 본다. 길고도 냉혹한 겨울의 어둠을 건너, 이 봄이, 참으로 멀리서 돌아왔다.





이성부의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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