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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Mar 19. 2017

간이 정류장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는, 하다못해 스쳐가는 차마저도 쉽게 찾아볼 수 없던, 삐뚤빼뚤한 글씨로 행선지가 적혀있던 간이 정류장에서, 하루에 서너 번 다닌다는 완행버스를 기다렸다. 그 당시 나를 가장 매혹시켰던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집어 들고서, 나는, 잠시 이 세상과 완전히 유리(遊離)되었다고, 생각했다.


해가 저문 저녁에도 그해 여름의 더위는 숨 막힐 듯 했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정류장 밖으로, 어딘가 어긋나 있었던, 내 안을 부유했던 우울들이 조금씩 새어나왔다. 그 끈적거리던 열기 속에서, 유년기가 떠올랐다가는, 천천히 부풀어졌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마치 심해(深海)처럼. 그렇게 내 삶은 삐거덕대며 덜컹거리는, 붉은 정지등에 멈춰서 있는, 고장 난 신호등이었다.


그 시절 나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우울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던가. 세상을 일찍 알아버린 어린 소년이었던 나는, 낯선 작가, 낯선 나라, 아름답고 기이했던 수많은 이야기들로 가득한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직도 기억한다. 열 살 무렵, 까치발로 발돋움을 해서야 겨우 꺼내 읽었던, 500 페이지가 넘었던 <폭풍의 언덕>은 나로 하여금 문학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한 첫책이었다. 그전까지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혹은 이솝우화에 나오는 옛날이야기들에 두근거리는 어린 아이였던 내게, 이 격정적이면서도 광기어린 사랑의 이야기들이, 폭풍우 치는 밤의 황량함이, 서른에 요절한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불우함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이, 어린 심장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렇게 비밀스러움으로 가득 찬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른 성장통이 시작되었다.



그때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에도, 스스로 활자중독이라 칭할 만큼, 눈이 먼 채로, 길고 긴 문장들을 읽어나갔다.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미를 비롯하여 남미문학에 이르기까지 깊은 밤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수많은 이야기가, 따뜻하거나 날카롭거나 현학적이거나 분절된, 혹은 오역투성이의 문장들이, 그리고, 이상, 김동인, 염상섭, 김유정, 이범선, 황순원, 손창섭, 이청준, 박경리, 황석영, 조세희, 윤대녕, 조정래, 김승옥, 김연수, 한강의 섬세하면서도 숨 막히는 이야기들이, 그들의 치열함이, 외로움에 웃자라기 시작한 나를 품어내었다.

  

그래도 미처 해소되지 못한 마음들이 다시 피어오르면, 나는 일기를 써내려갔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벗어난 소년이었던 열서너 살 무렵부터 스탠드의 작은 불빛에 의지해 써내려갔던 일기들은, 종종 내 유일한 벗이 되어주곤 했다. 세상 속으로 나를 풀어놓는 통로들은 열 몇 살, 사춘기를 건너는 동안, 제멋대로 몸집을 부풀리며 커져갔고, 자주 출구를 잃은 우울들은 내 몸 속 어딘가에 떠돌아 다녔다.

  

간간이 열꽃이 피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종일을 걸었다. 버스 몇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혹은 부러 행선지를 빙빙 둘러가는 버스에 몸을 싣기도 했다. 봄날의 꽃잎도, 여름날의 소낙비도, 알지 못했던 계절들도, 점점이, 나와 함께 걸었다.



그날도 외롭고도 쓸쓸했던 날들 중 하나일 것이다. 낯선 행선지를 붙이고 있는 완행버스에 충동적으로 몸을 실었던 것은. 어디로 간다는 목적지 하나 없이, 표를 끊고 허름한 버스에 올라탔던 것은. 무작정 차장 사이로 끈질기게 따라오던 따가운 햇볕을 뒤로 하고, 아무 것도 없던 작은 간이정류장에 내렸던 것도 역시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그때의 나는 고집불통. 멈춰선 회전목마처럼, 앞으로도, 뒤로도, 그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했던, 대책 없던 나이였다.

철 지난 해변가마냥 폐기되던 감정들로 몸살을 앓던 그때, 간이정류장의 낡은 나무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내 곁에 역시 아무렇게나 몸을 구기고 앉았던 것은, 햇볕이었고, 해지기 시작한 가방이었고,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책과 일기장이었다.


아무도 없는 간이버스 정류장에서 나는 길을 따라 걷거나, 혹은 책을 읽다가, 무어라 끄적였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기 위해 완행버스를 기다렸다. 여름이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느릿하게 자라나고 있었고, 길가에는 길게 자라난 옥수수가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렸다.



책장을 덮고, 멈춰 섰다.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세상은 온통 짙은 초록의 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처음 와 보는 낯선 타지에 나는 와 있었다. 비로소 내 안에서 오래 들끓던 부유물들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계절을 담은 청량한 바람들이 내 안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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