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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영 Mar 21. 2017

당신을 향해 걷는 하루


#1.

봄비가 내렸다. 이 비가 오려고 하루 종일 마치 몸살이라도 앓듯 차갑고 눅눅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반대로 이 빗속에는 따뜻함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아직 꽃눈으로 맺혀 있는 여린 가지 속 어린잎들도 이제 곧 세상 속으로 고개를 내밀 것이다. 흙들은 더욱 보드라워질 것이며, 오래된 담벼락 너머 매화며 벚꽃 같은 봄꽃들도 무더기 피어날 것이며, 뒤뜰 안에 있던 꽃대와 같은 맑고 조용한 것들은 수런거리며 출렁거릴 것이며, 세상은 한층 더 온유해질 것이다. 이 도시도 여린 꽃잎들에 둘러싸여, 창공에다 푸른 잎사귀들을 싹 틔울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따뜻함’을 예측할 수 있는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돌아서기만 하면 차가워지던, 그날들에서, 이제야 비로소 벗어났다. 앞으로도 사는 날 내내, 당신이 사는 세상이 이날들만큼 따뜻하기를.


#2.  

가까운 곳에 작은 박물관이 있었다. 박물관 옆 자그마한 오솔길을 따라 느리게 걷다 보면, 둥근 능선의 고분들이 평온하게 누워있는 고요함이 좋았다. 커다란 흙무덤이 끌어안은 것들은, 주름지고 오래된 세월과 어린 벌레들이었으며, 피었다가 지는 마른풀이었으며, 바람이었으며, 한껏 적막해진 나무들의 온기였으며, 유년을 닮은 하현달이었으며, 지천으로 깔리던 햇살이었으며, 어느 사이엔가 가슴에 숭숭 구멍이 뚫려- 한없이 가벼운 체념의 무게를 가지게 된 강물이었으며, 뒤척임이었으며, 쓸쓸함이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던 날이면, 나는, 그 깊고 깊었던 고분에 기대어, 세월을 밀어 올리는 뿌리의 이야기들에 한참을 귀 기울이곤 했다.



#3.

다시, 툭툭- 일어나, 고분에서 박물관 뒤로 조금 더 걷다 보면, 머지않아 작은 나무다리가 보였고, 그 옆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나무다리는 이미 햇볕에 많이 퇴색되어 있었고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작고 볼품없는 모양새를 지녀, 사람들은 곧잘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하곤 했다. 그래서 가을이면 이 쇠락한 나무다리 옆 은행나무가 있는 풍경은 오롯이 내게만 허락되곤 했다.


나는 그곳에서 노란 은행잎 사이로, 바람들이 내는 길을 온몸으로 듣곤 했다. 조금만 더 귀를 기울이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대나무들이 잎과 잎을 맞대며 내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지상에서 움직일 수 없는 것들이 내는 소리들은, 바다를 닮았다. 이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유난히 덥고 유난히 춥다는 이곳 위로, 어둑한 새벽 바다에서 나던 소리들이, 그 시린 파도소리들이 대나무와 은행나무 사이에서 들려왔다. 이 소리의 단단한 집들은, 동시에 나를 지상에서 영원으로 이끌곤 했다. 그렇게 사계절을 지나는 동안,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들을 내 안으로 들여놓았다.



#4.

박물관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단골 아닌 단골 커피점이 있었다. 그곳은 요즘 유행한다는 이름 있는 체인점도 아니었고, 외진 골목길에 있는,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유난히 작은 카페였다. 출입문도, 심지어 카페 안에 놓여 있는 몇 안 되는 나무의자들도, 테이블도 작았다. 그리고 주인을 닮아 조용한 카페 곳곳에는 주인이 직접 그렸다는- 엽서 뒷면에 그려진 작은 그림들이 놓여 있었다. 목탄을 이용해 그린 크로키나, 채색이 두드러진 그의 그림들은 꽤나 시선을 끌어 나는 그의 그림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이곳은 내겐 이 지역을 찾을 때마다 숨어드는 은신처이자 아지트여서, 나는 이 안락한 어둠 속에서 오랜 산책으로 지친 다리를 쉬곤 했다.


이 카페에서는 주인 남자 혼자서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렸다. 그러다 보니 손님들도 단골만 오는 듯했고, 단골 아닌 단골인 나는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했다.

다만 이곳에서는 주문을 할 때, 조금 크고 또박또박 말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곳 주인이 귀가 불편하고, 말이 조금 어눌하다는 걸 알아차린, 단골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약속 같은 것이었다.


주문이 끝나고 나면, 그는 곧 하얀 머그잔을 정갈한 나무쟁반에 올려서 크래커 같은 간단한 서비스 간식과 함께 내오곤 했다. 카페의 이름은 [Gabe]. 독일어로 ‘선물’이라고 했다. 이 대여섯 평 남짓한 작은 카페에서 종일을 보낼 남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이름을 지었을까. 단조의 장식이 아름다운 출입문을 열고, 이곳으로 들어와 짧은 쉼을 가질 이들에게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종일을 붙박이처럼 있을 그에게, 두꺼운 문을 열고, 밀려들어올 세상의 이야기들이, 선물이 되어서 였을까.


그는 저 문을 열고 들어왔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을 것이다. 몇몇에게는 와 닿았을 인사를,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는 기억에도 남지 않을 인사를 건넸을 그에게, <문이 열린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간과 마주한다는 것. 누군가들이 끌고 왔을 긴 바람들을 맞이하는 일. 그래서 그는 말갛게 헹군 선한 웃음을 커피잔에 담아 건네는 것이다.


그리고 손님인 우리들은, 그가 건네는 커피와, 햇살을 받아 찰랑이는 머그잔이 가진 온기를, 작은 크래커 같은 소소함들을, 낯선 타인이었을 그와 우리들의 불문율들을 기꺼이 맞이하며, 가슴 어딘가가 살구꽃처럼 밝아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5.

봄비를 타고 온 봄날도, 오래된 고분도, 커다란 은행나무도, 맑은 커피향도, 내 짧은 편린들에 얹혀 나란히 길을 걸을 것이다. 어느 따스한 계절, 당신이 머무는 풍경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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