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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니니 Apr 11. 2022

03. 가! '족' 같은 회사에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다. 원인은 어떠한 사건을 항상 일으키곤 하는데 작은 나비의 날갯짓으로 생긴 작은 바람이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선 거대한 폭풍이 될 수도 있다고 알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나비효과라고 하는데 나의 경우 이 나비효과는 아니다. 왜냐면 처음부터 아주 큰 폭풍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2010년 2월에 대학교 졸업을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고 2009년 11월에 졸업을 앞두고 취업에 성공 했다. 어찌 보면 아주 운이 좋은 케이스였다. 면접 한 번에 바로 취업에 성공하며 어려움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제대로 보면 이것이 이 불행의 시작이었을 수도 있다. 이 회사는 일본과 무역을 하는 회사였는데 일본에서 빠징코 기계의 도면을 보내면 빠징코 기계에 들어가는 플라스틱 사출을 위한 금형을 만들어서 파는 무역회사였다. 무역에도 관심이 있었고 전공으로 금형을 해서 금형도 할 수 있어서 기대가 켰지만 이 기대가 무너지는 데는 역시나 얼마 걸리지 않았다.

 허접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하고 회사에 취직을 했다. 근로계약서라고는 하지만 내용은 수습기간은 3개월이며 그 기간 동안 최저시급*8로 하루를 계산한다는 것. 수습기간 중 야근은 없으나 회사 사정으로 야근은 있을 수 있다는것, 하지만 급여에는 반영되지 않는다는 것. 수습기간 이후 정직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정직원이 됐을 때부터 연차 같은 것을 인정한다는 한 장 짜리 계약서였다. 빈틈이 많았고 '을'이었던 내 입장을 '슈퍼 을'로 만들어주는 그런 계약서였다. 연매출이 150억 이상을 자랑하는 회사였지만 설계부서에는 2명이 있었다. 50대의 부장님, 그리고 20대 막내인 내가 전부였다. 50대 부장님은 집에 가기 싫어했다. 매일 저녁을 회사에서 먹고 사장님이 퇴근하면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우리를 가지도 못하게 하고 말이다. 수습기간 동안 야근은 없다고 했으나 부장님의 생각은 '같은 팀원의 야근은 모두의 야근!'이었다. 그 야근의 대부분은 본인의 수면 혹은 고스톱같은 게임이었다. 이것은 나의 퇴사를 위한 첫 번째 동기부여였다.

 두 번째 동기부여는 회사 구성원들이었다. 회사에는 매출에 비해서 직원들은 많지 않았다. 우선 내가 있는 사무실과, 현장으로 나눠져 있었다. 사무실은 3개의 부서로 나눠지는데 영업, 설계, 회계팀이었다. 육사 출신의 사장님은 군대의 버릇 때문인지 종종 전 직원을 불러놓고 자신의 자랑을 하며 훈화를 즐겼다. 25살인 나를 사장실로 불러서 본인의 부와 권력, 여럿 가지고 있던 외제차들을 자랑했다. 자동차도 없이 버스 타고 다니는 나에게 자신의 차가 제로백이 4초라고 자랑을 했다. 

'아 어쩌라고...'


 자신의 전화 한 통이면 은행장이 사무실로 달려올 거라고 했었는데 허풍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은행에서 회사의 업무를 잘해주지 않자 자신의 모든 돈을 다른 은행으로 이체해버렸다. 그리고 은행에게 더 이상 거래하지 않겠다고 통보를 하자 무려 금으로 된 선물을 들고 은행장이 바로 달려온 적도 있었다. 

 이 회사의 문제는 아까도 구성원이라고 했는데 우선 3명이 있는 회계팀의 부장은 사장의 큰 딸이다. 그리고  영업팀에 있는 대리는 작은 사위 예정자였다. 이 회사에서 없어선 안될 사람이 상무인데 상무는 사장이 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 일했던 사이로 상무가 하는 말은 사장이 무조건 들을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  나중에 알고보니 상무는 사장의 조카였다. 현장에는 상무의 조카가 부장을 맡고 있었고, 그 바로 밑에는 상무의 조카의 사촌동생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으니 정말 가'족'같은 회사였다.

위니펙의 맑은 하늘. @photo by 아름다운 니니


 서열을 중시하는 회사 분위기와 그것을 만들어가는 사장님. 이 회사에서는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내 위에 있는 과장을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계약직으로 내가 받는 돈은 100만 원이 채 안됐는데 과장의 월급을 보곤 더 깜짝 놀랐다. 과장님은 150만 원도 받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나와 같이 야근을 하고 친분을 쌓고 있었는데 이 정도밖에 못 받는다는 것에서 허탈함을 느꼈다. 이 허탈감은 이내 의문으로 바뀌었다.

'아니, 이 정도밖에 못 받는데 어떻게 사는 거지?'


 그 뒤로 과장의 삶을 관찰했다. 우리의 회사는 부천시에 있었는데 과장의 집은 시흥시 신월동이었다. 그곳에 있는 작은 다세대 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었는데 월세는 본인이 내고 있었다. 작은 차를 끌고 다녔는데 이 차는 회사의 차량이었으나 실소유자는 과장이었다. 출퇴근할 때, 업체를 갈 때, 쉴 때, 놀 때, 사장의 딸과 데이트 할 때 등 항상 과장은 이 차를 타고 이동했다. 물론 기름 값과 차량 정비에 들어가는 돈은 회사의 카드로 계산했으니 차량 유지비가 전혀 들지 않았다. 핸드폰 또한 회사에서 제공하는 폰을 사용했는데 개인폰이 없이 업무용 전화기로 개인용무까지 사용해서 추가로 통신비용이 나가지 않았다. 즉 자동차 유지비, 생활비, 식비 모두 회사에서 해결하니 이 사람은 150만 원을 안 받아도 생활이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이 것들을 보며 나에게 오지 않을 복지가 예상이 되었다. 나는 빠른 시일에 퇴사를 결심했다.


 의외로 사장님은 나를 좋아했다. 사장님은 두 사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첫 사위가 될 사람은 프로 골퍼였는데 우승권에서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골프를 좋아하는 사장님과 골프를 종종쳤는데 사장님 피셜로 비슷한 실력이라고 했다. 사업으로 성공한 본인이 볼 때 우승권에서 멀어보이는 프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내년에는 골프를 그만두게 하고 자기네 회사에 데려 올 거라고 항상 말했다. 작은 사위는 고졸 출신에 직업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자신의 작은 딸과 아르바이트하다가 만나면서 할 수 없이 데리고 일을 한다고 말했다. 이런 사위들 때문일까 사장은 나를 아들이라고 부르며 내가 계속 이 회사에서 일을 하길 바랐다. 물론 상무도 그랬다. 설계 프로그램부터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어서 상무는 나를 잘 찾았다. 외국 바이어가 왔을 때도 나를 불러서 함께 만나러 가곤 했다. 이 둘에게 퇴사를 알렸을 때 퇴사를 만류를 했지만 내 마음은 이미 확고했다. 


 마지막 이유는 휴일이었다.

당시 나는 연애 중이었다. 지금의 아내와 연애 중이었는데 무역회사의 단점은 연애에 치명적이었다. 우선 우리의 국경일에 상대 국가는 쉬지 않으므로 쉴 수 없다. 일본에서 전화가 오고 그것을 가지고 한국에 있는 업체와 일을 해야 되기에 쉴 수 없다. 반대로 일본이 쉬는 날은 한국이 쉬지 않으니까 쉬지 않는다. 나는 국경이 없이 계속 일을 해야 됐다. 때는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오후 4시 해가 지고 어두워진 회사에서 상무와  둘이 야근을 하고 있었다. 이런 날 내가 상무와 일을 하고 있다니... 나는 여자 친구가 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를 상무와 일하며 내리를 눈을 보고 있자니 짜증이 솟구쳤다. 당시는 주 5일제 근무가 의무 시행 이전이어서 토요일에 당연히 출근을 해야 됐다. 주 5일제가 의무는 아니었으나 공단 내에 있는 많이 회사들은 이미 토요일에 쉬는 분위기였다. 주말에 출근하지 않는 사장과 상무 그의 딸은 공단의 분위기를 알리가 만무했다. 조금이라도 집을 나와있고 싶어하는 부장과 나는 할일이없어도 회사에 나와서 네이버 기사를 들락거렸다. 그렇게 오전 시간을 때운 후 점심을 먹고 조금 졸다가 저녁 때 집으로 돌아갔다. 생산성 없이 토요일 하루를 출근하며 버렸다. 부장님이야 집에 있으면 심심하겠지... 나는 아닌데 말이다.


'그래! 퇴사만이 나의 살길이다!'


 퇴직서를 내고, 사인을 받고, 회식을 하고 다음날부터 출근하지 않았다.

약 2달 반. 

나의 첫 번째 직장생활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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