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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름다운 니니 Apr 14. 2022

04. 가족 회사로

 어렵지 않게 한 취직이라 그런지 퇴사도 어렵지 않게 결정했다. 

그곳에선 미래가 보이지 않았고, 나의 선택에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었다. 20대 중반의 사회 초년 인턴에게 자신의 부와 권력, 재력을 과시하는 사장 밑에서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없다고 믿었다. 하는 일에 비해 회사에 오래 있으면 열씸히 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부장 밑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없다고 믿었다. 돈을 벌어본 적도 없기에 돈이 아쉬운 것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생활이 가능했으니 퇴사가 최선의 방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부모님들은 왜 자녀의 선택과 인생에서 항상 조바심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나는 각자의 인생에 각자의 시간표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에게 맞는 옷이 있듯 자신의 삶은 자신의 시간에 맞게 흘러가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20살에는 대학에 가야 됐고, 늦어도 21살에는 군대에 가야 됐다.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해야 됐고, 20대 후반에는 결혼을 해야 됐다. 결혼을 하면 집이 있어야 됐으며 당연히 차도 있어야 됐다. 결혼한 후 1-2년 안에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인생을 살라고 다들 말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곧 망할 것처럼 생각하고 조바심에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혼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적응자로 낙인찍으며 곧 뒤처지고 도태될 것이라고 세상은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잘못된 정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일 뿐이었고, 아빠의 생각은 달랐다. 아빠는 내 전공을 살릴 수 있는 취직자리를 본인이 직접 알아보셨다. 아빠 거래처에 나와 13살 차이가 나는 젊은 청년 사장이 하나 있었는데 혼자 일하고 있었고 때마침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 자리를 내가 채우게 되었다.

 

 새로 입사한 회사는 CNC선반을 통해 금속을 가공하는 일이었다. 젊은 사장이라서 그런지 일하는 환경은 자유로웠다. 출근시간이 있었지만 퇴근은 자유로웠다. 일이 있으면 야근, 없으면 조기 퇴근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바빠져서 거의 야근을 했지만 초반에는 3-4시에 퇴근할 때도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곳에 입사시킨 아빠는 이런 시스템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빠 세대는 일이 없어도 회사에 있어야지 일이 들어온다는 믿는 세대다. 하지만 이 사장의 생각은 '일은 메일로 들어오지 공장으로 오지 않는다'였다. 일하다가 일이 잘 안 되면 술 마시러 가기도 하고 종종 시장에서 족발을 사들고 와서 먹었다. 월급날에는 근처에 있는 친한 형들과 회식을 하고, 노래방에 갔다. 작은 소기업이어서 복지는 아쉬웠지만 인간미가 있던 회사였다. 


해지는 위니펙. 그립구나.


 내가 일하던 회사는 재미있는 공간이었다. 하나의 공간에 두 개의 작은 회사가 있었다. 우리 회사 2명, 옆에 회사 2명. 이 4명은 항상 한 세트였다. 서로 바쁘면 서로의 일을 해줬고, 모르면 묻고 알려주었다.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고 월급날도 같아 같이 회식을 하며 다녔다. 60평이 안 되는 공간에 CNC 선반 5대와 범용 선반과 밀링이 각 1대씩 있었다. 옆 공장의 형들은 30대 후반이었지만 모두 이 분야에서 15년 넘게 일한 베테랑들이었다. 사람들은 한 분야에서 10년 넘에 일을 하면 명장 혹은 명인, 고수 같은 근사한 이름들이 붙는다. 하지만 유독 2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이런 호칭이 붙는 것 같지 않았다.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들은 주로 쇠쟁이, 공돌이 같은 말들로 비하되었고, 좋게 불려봐야 기술자 정도였다.

 이곳에서 배운 일의 기초는 나의 능력의 바탕이 되었고, 기술의 실제가 되었다. 이들과 함께 웃고 울며 시간을 보냈다. 두 번의 겨울을 보내고, 세 번째 여름이 되었을 때 나는 또 한 번 퇴사를 하게 되었다. 1년 6개월을 보내고, 아빠는 CNC선반을 사셨고 나를 데려가셨다.


2011년 6월의 마지막 날 나는 두 번째 퇴사를 했다.

그리고 7월 1일.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캐나다로 갈 수밖에 없게 된 모든 일이 시작되었다.



사담 : 나는 세상의 시간에 나를 맞추는 것을 예전부터 좋아하지 않았다. 대학 입학 후 돌연 휴학을 해서 다음 학번과 학교를 같이 다녔고, 대부분이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획득하는 운전면허도 졸업 후 3년이 지나서야 응시하고 취득했다. 친구들이 전역을 앞두고 있을 때 나는 입대를 준비했다. 2006년 8월에 입대를 했는데 나는 굳이 6월 이후로 입대를 미뤘다. 이유는 2006년 6월 독일 월드컵을 꼭 사회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도 세상의 시간의 편견과 싸우고 있다. 결혼하고 10년을 바라보고 있지만 아직 아이도 없고, 집고 없다. 그럼에도 나는 잘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고, 내 삶이 뒤틀린 것 같지만, 그럼에도 무난하게 살아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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