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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Nov 08. 2017

90년생 혜진씨

우리가 믿고 있는 '찬란한 젊음' 내지 '탁월한 삶'은 몹시 편협하다

학생기자 시절의 일이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은사님께서 내게 프리랜서 취재를 하나 맡겨주셨다. 당시엔 기자 계열 취업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포트폴리오 확장에 있어서도 굉장한 경험이 될 일이었다.  첫 스타트를 끊는 날이라 친동생까지 모델로 섭외해서 각 잡고 현장 취재를 나섰다. 


굳이 동생까지 끌고 가서 만전을 기하는 까닭은 클라이언트의 요청을 정확히 캐치해내려는 노력이지만, 사실 내가 감히 나설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린 대안이었다. 취재처가 경력단절 여성을 도와주는 곳. '여성'을 위한 공공기관이기 때문이다. 취재처가 여성을 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취재원도 여성을 섭외하는 게 낫고, 동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을 데려가는 나으리라. 나는 맨투맨 마킹을 동생에게 맡기고 살짝 빠져 경청하기로 했다. 


사회적 약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공간. 그리고 사람. 나는 이런 곳에서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내가 풋내기 기자 생활을 하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사람을 더 나아지게 하는 건 시공간과 사람의 콤비네이션이다. 사람과 세계에 대한 이해를 자연스럽게, 심지어 강렬하게 확장시켜주기 때문이다.


기관에서 섭외한 취재원과 10분가량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했다.


28세, 1990년생. (여기까진 나와 같다.)
세 살 어린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이자.
세 아들을 둔 '엄마'다.


깊이 여쭤보면 실례가 되는지라 그 이상의 신상정보를 여쭤볼 순 없었지만
취재원이 나와 아주 이질적인 삶을 살아왔다는 걸 어렵지 않게 미루어 짐작 가능했다.

저런 건조한 팩트에서도 , 간단명료한 개인 서사를 추려낼 수 있다.

때 이른 결혼을 했지만, 썩 괜찮은 사람을 배우자로 만난 사람.
그 덕분에 아이를 많이 가졌던, 아이를 많이 낳았기에 20대의 대부분을 가정에 힘을 쏟은 사람, 
'나' 보다는 '남'을 위해 산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대한민국 20대가 성장 내지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위한 일에 몰두하는 것에 비하면, 그녀는 서울과 부에노스아이레스만큼 먼 대척을 둔 셈이다.

양육은 같이 사는 시부모님이 도와주시기도 하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잘 커서(*아이 셋을 둔 이모님이 이르시길... 셋째 아이부터는 첫째 둘째가 기른다 카더라!)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를 알아보다가 1인 창업을 알아보게 됐고, 마침 이 기관이 적절한 교육과 여유로운 공간을 제공해줘서 올 겨울부터 꾸준히 다니고 있다는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눈치껏 센스있게 스냅샷도 잘 찍어둔 동생님.

취재원의 눈빛이 굉장히 맑았다. 가족 얘기를 할 때나 일 얘기를 할 때나 한결같이 맑았다. 치우침 없이 무언가를 사랑하는 능력을 사람만이 가진 눈빛, 자기 자신이 선택한 일에 망설이지 않는 사람만이 지닌 맑은 눈망울이었다. 

나는 이렇게 자신이 택한 인생으로 행복을 열어젖히는 사람을 만나면, 오래 묵은 편견이 내 마음 바깥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떠오른 편견 덩어리가 망치로 후려친 유리처럼 산산조각 나는 기분에 휩싸인다.

왜 사람들은 가정을 일찍 꾸리면 불행해진다고 입을 모으는가? 싱글라이프를 오래 누리지 않으면 바보 같은 짓이라며 타인을 선동하는가?  아이를 일찍 가진 자에게 왜 그리들 쉽게 혀를 차는가? 

이보시오 여러분! 우리가 믿고 있는 '찬란한 젊음' 내지는 '탁월한 삶'이란 참으로 편협한 것 아니오? 

내 배우자, 내 아이, 내 부모, 내 울타리를 잘 꾸리는 게 삶의 목표이자 행복인 사람도 있소. 여기에 나의 젊음을 쏟아붓는 게 대체로 만족스럽다면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오. 누가 
감히 누가 말을 쉬이 보태며 가벼이 욕보인 단말이오?


세 아이와 남편이 소중한 만큼
가정 때문에 펼치지 못한 나의 꿈, 나의 직업도 소중하므로
둘 사이를 화해시키려는 취재원의 진심이 인상적이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바를 기꺼이 끌어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하려는 사람이었다.

아주 짧은 인터뷰였지만 오래도록 기억 남을 만남이었다.
인수합병을 논하는 유망기업의 CEO나 한창 잘 나가는 연예인을 만난 것보다 값진 만남이었다.

당신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90년생 혜진씨>.


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물리적인 어려움, 현실적인 갈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혜진씨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가에서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읽게 됐다. 간단한 줄거리 요약과 일간지 소개글로 어렴풋이 짐작하는 바였지만, 아마 울분, 한계, 절망, 환멸, 고통에 독자들이 공명했을 것이다. 비관적이고 절망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폭로하며 매듭지어지는 소설. 


페미니즘에 대해 판단하는 일은 뒤로 미루고, 그냥 지영씨의 삶을 따라갔다. 아마 혜진씨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사상에 끼워 맞춘 채 소설을 읽었겠지. 이 책의 리딩 포인트는 '現 한국 여성의 삶'을 푹 고아 내서 길어 올렸다는 점일 게다. 삶을 따라가면 된다.


하지만 소설과 현실이 다른 점은 네버엔딩 스토리. 책장은 덮여도 인생은 쭈욱~ 이어진다. 그래서 현실은 무조건 소설보다 나아질 수 있다. 아니 나아져야만 하겠다. 소설에 나온 세계보다 이 땅에 발을 디딘 나의 세계가 더 나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최근들어 쏟아지는 사회의 수많은 약자들의 이야기는 힘을 잃는다.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현실세계에는 생각보다 낙관적인 요소가 많다. 반드시 어려움과 갈등을 해소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풀어내기 위해 대한민국 어딘가의 누군가는 이미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서로 도와가며 좀 더 나아지자고 애쓰고 있다. 그것은 공간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어쨌든 무언가와 무언가가 끊임없이 결합하며 힘을 키워나가고, 그런 게 세상을 실질적으로 바꿔나가는 것이다.

중요한 건 이런 연대가 널리 알려지는 것이고,
내가 맡은 역할은 오늘 둘러보며 생각해낸 물리적 실감을 최대한 흥미롭게 재구성하는 일이다.

대체 어떤 식으로 퍼지게 될진 모르겠지만,  디 누군가에게 격렬한 충동을 불러일으키거나 운명의 나침반이 되길 소망하며, 그렇게 다짐하며 기사를 지어 올렸다.


마감할 때 반복재생한 노래를 옮겨적으며 마감후기를 마친다.

https://www.youtube.com/watch?v=NCEcWA0wy_E&feature=youtu.be


I must be myself, Respect my youth
자기자신을, 자신의 젊음을 믿어봐 

Don't be a drag - Just be the queen
끌려다니지마 - 넌 대단해질거야

' Cause baby' you were born this way
왜냐면 넌 그렇게 태어났으니까

  - Lady Gaga / <Born This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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