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의 시대에 종말을 고하며.
일단 킹기하의 브금부터 깔고 시작하자.
<내 사랑에 노련한 사람이 어딨나요>
이역만리 유학중인 동네친구 K는 친구를 잘 사귀고,공부도 씩씩하게 해내고 여러모로 잘지내는 모양이다. 딱 하나 갈팡지팡하는 게 있으니...역시나 만악의 근원 연애 트러블. 모처럼 영상통화랑 카톡 길게하며 사연접수받는데 연애썰이 박경리 선생님의 <토지>뺨치고로 길다. 요약을 하자면 K가 같은처지의 유학생을 만났는데 K랑 여러모로 잘 맞고 잘 지내는 모양.
문제는 이 친구가 곰신인데, K와도 잘 지내고 싶어한다는 거다. 곰신의 지극히 뻔한 레퍼토리인
구닌 남친을 기다린 2년이 너무 소중해서, 자기한테는 그 2년 동안 기다리는 게 자기 인생에서 너무나 커서, 그게 20대의 전부여서. 근데 K도 좋아... 곰신 아닌 사람은 이런 마음을 이해 못할 거
라고 했다나 뭐라나...
여기 까지 들은 나의 대답은
추가로
"낭만적 사랑에 대한 열망은 포기할 수 없으면서, 실질적으로 자기를 예뻐해줄 구체적 사랑이 필요한 아이라고 판단하는 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이 마음에 든다면. 들이대시오."
라는 판결문을 낭독해드렸다. 써놓고 보니 조낸 포청천 같다.
마음 같아서는 K한테 정신 차리라고 맴매라도 때려주고 싶었지만!
이러고 일주일이 지나서 본인을 오르페우스에 빗댄 비극설화를 들었다. 오르페우스야 말로 희랍신화 탑3안에 드는 불행한 싸나이 아니던가. 어휴... 뭐 이런 종류의 사랑은 끝장을 봐야 새로운 지평이 열린다.
화이또 내 칭구!
지난 일요일, 빠나나우유 마시면서 공원산책하며 동네친구P에게 접수한 얘기의 일부도 연애사연이다. 사연을 들어본 즉슨 교회 청년부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자기는 틀렸다는 둥...꼬추를 때야한다는 둥 풀이 잔뜩 죽은 채 푸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찬찬히 사연을 뜯어보니, 우리 P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다. 머리만 열심히 굴리고 있으며, 연인과 물리적인 실감을 제대로 공유하지도 못했다. 교회 사람들을 향한 눈치, 어떤 상황에서도 사나이다워야 한다는 눈치, 자기자신을 향한 눈치. 눈치란 눈치는 다 보고서 간만 보는 게다.
"지랄~ 들어보니 4월에 니가 딱히 뭐 하자고 한 것도 없고, 둘이 딱히 만나지도 않았는데 뭔 꼬추타령이여! 뭐라도 하고 와서 다시 지랄해라 ~_~...기죽지 말고 임마."
두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친구들의 반응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이 새끼 팩트폭력 보소...사람이 이렇게 담백해질 수 있냐? 네가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연애)사랑은 절대 포기 안했었는데 어쩌다가 이렇게 됐냐?!"
천만에!
나는 포기한 적 없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틀린 말은 아니올시다. 나도 앞서 언급한 친구들과 에피소드와 유사한 체험이 있고, 무엇보다 젊은 베르테르가 울고 갈정도로 낭만적 사랑을 추종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이를테면 <러브픽션>의 구주월 같은 느낌으로 사랑하는...
저런 짓이 멋지다 여겼고, 종종 비슷한 짓을 했지.
근데 지금은 '포스트-낭만주의'를 맞이했다 해야하나...
다시 한번 틀어보는 장기하의 노래. 리쓴!
나는 생선회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산울림을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광화문 거리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미숫가루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통기타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는 손편지를 좋아하지만
당신은 안 좋아해도 괜찮아요
나랑 똑같은 것들을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더랬어요
(있었더랬어요)
내가 아 하면 아 그리고
어 하면 어 하던 사람이 있었더랬어요
(있었더랬어요)
당신도 결국엔 날 떠날 거잖아요
아무래도 난 상관이 없어요
그 사람마저도 나를 떠났잖아요
아무래도 난
괜찮아요
다만 이런 식으로 시니컬해지는 까닭은 요즘 한창 '사랑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분해하려면 몇가지 잣대를 설정해두고, 잣대 안에서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하는 철학적 방법론을 쓸 수도 있다. 물음에 물음을 이어나간 끝에 진리에 도달하는 소크라테스식 산파술을 쓰기도 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낼 수 없을 때' 선택하게 되는 대안적인Alternative 행동이기도 하다.
요컨대 사랑에 관한 통념, 상식, 경험을 긁어모아 토막내고 자르고 붙이기를 거듭하며 낭만적 사랑의 모순을 극복하고 싶은 거다. (*'낭만적 사랑의 모순'이란 무엇인가? '속물근성의 합리화', '자신의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 '낭만적 이미지의 낭비적 소비' 등등이 있겠으나, 이 부분은 댓글로 풍성하게 논의해봅시다 여러분.)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는 인간행동의 대부분은 모순덩어리이기 때문에, 모순임을 알면서도 지옥도를 제발로 걸어가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
내 사랑에 노련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겉보기에 철저한 냉소와 짙은 허무감을 뿌리로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랑의 본질을 탐사하는 작업에 있어서만큼은 어쩔수 없이 엄격,근엄,진지한 잣대를 대고만다.
허나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사랑의 본질을 해체하는 일은 '사랑하고 난 후after에 할 일'이라는 것이다. 제 사랑에 노련해지려면, 사랑하게 된 것을 (감응할 수 있는한 최대한으로) 껴안는 게 먼저다.'
요컨대 "관념이 감각을 앞지르면, 제대로 사랑할 수 없게 되더라"는 게 나의 잠정 결론.
그래서 요즘 사람 만나면 관념이나 판단으로 앞지르지 않고, 대면 했을 때 주어지는 것으로만 느끼려 애쓴다. 지금은 의식적으로 하는데 시간이 지나면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 사실 요즘 운동 열심히하고 좋은 먹거리 챙겨먹는 게, 다 감각을 활성화시켜보려는 노력이다. 감각을 통해 언제든 관념을 제압하려는 목적.
여하튼 예전보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탁월하게 주고받을지를 열심히 고민하게 되는데, 전보다 잘 사랑하고 싶어서 하는 작업이라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다. 시대Era도 그렇고 세대Generation도 그렇고,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바뀌는 전환기에 살고 있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했다간 될 사랑도 안된다. 전환시대에는 전환시대에 어울리는 톤&매너가 필요하다.
P.S
지금 적어둔 아무말대잔치는 <라라랜드>를 틀어놓고 씀. 엮씌 로맨스영화는 사랑타령으로 키보드를 내달리게 하는 영감을 쑴풍쑴풍 소환한다. 다시 보노라니 미아와 세바스찬은 각자가 가진 속물근성과 낭만을 향한 열망을 나름 잘 화해시켰다는 생각이 드네.
잘 화해 된 결별. <라라랜드>를 인생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말하는 이 영화의 미덕이겠지.
p.s Ⅱ
만약 "당신의 인생영화가 뭔가요?"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라라랜드>를 포함해서 <500일의 썸머><어바웃 타임> <비긴 어게인> <이터널 선샤인> <비포 3연작> 같은 영화를 줄줄이 읊으며 인생영화로 손꼽는 사람은 비슷한 인구통계학적 범주 안에서 추려지며, 대체로 이런 사람들에겐 아주아주 비슷한 성격유형이 나타난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멘티스트'라고 하면 너무 비꼬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세상 낭만은 다 겪어보려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이건 너무 극단적인 케이스겠다. 이런 사람들은 희극이나 비극에 감정이입을 되게 잘한다. 장점은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점이겠고 그래서 인간미가 넘쳐난다. 단점은 정돈되지 않은 감수성을 자꾸 낭만으로 포장하거나 합리화해서 주변사람(특히 애인이나 前애인) 피곤하게 만든다는 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도무지 미워할 수 없다. 인간 특유의 모순을 하찮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모순을 나름대로 잘 수습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낭만에 적당한 원근감을 갖추면 누구보다 매력적인 사람들이기도 하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잘 보살피고 서로 부둥부둥하며 부디 즐겁게 어울리시길 바랍니다. 인간이 어디 맨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겠습니까?
P.S Ⅲ
언젠가 영화제에 갔을 때, 게스트하우스에 만난 사람들과 대화하며, 이 주제가 나란히 튀어나온 것도 신기했지만, 입을 모아 동의한다는 쪽에 의기투합 했던 것도 되게 신기했다.
영화취향으로 사람성격을 단정짓는 일은 경솔하지만, 예측가능한 범위 안에서 한 개인의 톤&매너를 포착하는 차원으로서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제에서 얻어온 뜻밖의 수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