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살았던 날의 절반을 살다

"죽음을 째려보면, 살아갈 이유 또한 명백해진다."

by 정필년

1.

사회초년생 특유의 찐득찐득하고 꾸덕꾸덕한 생의 본능을 다하는 일에 열심인 나는, 에로스와 사랑(내지는 무언가를 바라거나 특정 상태에 도달하려 애쓰는 어떤 마음이라 해두자)을 열심히 땠다 붙이며 살아갈 이유를 열심히 헤아리는 나는, 어느새인가부터 죽어도 될 이유도 나란히 헤아리기 시작했다.

그건 아마도 나이의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뀔 무렵부터였고, 도쿄에서 동생이 부탁한 지갑을 사러 갔던 우에노 공원과 그보다 조금 더 윗동네였던 니시닛포리를 걷다 만난 공동묘지에서, 도쿄현대미술관을 가던 기요스미-시라카와 역 근처의 고급주택과 자연스럽게 녹아들던 일본식 절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됐다.


동아시아 문화권이라면 마을 안팎에서 망자의 삶을 추모하는 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고, 일본의 장례문화도 TV 드라마나 영화에서 종종 봐서 놀라울 건 없지만, 그들은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에 망자를 모셔놓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더럽게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의 부동산을 생각하면 뿌리를 추적하고 싶어 지는 특정 지역 문화권의 흥미로운 풍습이겠다.) 좋은 나무를 깎아 만든 물바가지에 깨끗한 물로 묘비를 씻어주다, 얼마 안가 자리를 떠나는 일본식 추모문화가 퍽 신기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죽음이 일상이 되면, 그것은 나의 일처럼 생생하게 여겨지는 것일까? 죽음이 삶과 가깝다는 견해를 받아들이면, 삶에는 어떤 파장이 미칠까?


누군가의 죽음을 나의 일처럼 떠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죽음인지. 곰곰 헤아려 보는 것이다.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공평무사하겠지.


<VAGABOND> / Takehiko Inoue

2.

그런 내가 해마다 헤아리는 죽음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2020년을 기준으로 정정하게 살아계셨다면 아흔 살, 환갑을 아슬아슬하게 채우지 못하고 봄볕과 함께 생명을 다한 할아버지와 그런 할아버지를 15년 뒤에 따라간 할머니의 죽음이다.


가진 거라곤 세도가문후예의 자존심과 5남매 밖에 없던 몰락양반집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전쟁 속에서 탱크를 몰며 겨우 살아남은 남자의 삶을, 대학 입학을 하러 서울로 떠났다 허겁지겁 피난길에 그런 남자를 만나 아버지와 아버지의 남매를 낳은 여자의 삶을, 물려받은 거라곤 비가 오면 농작물이 씻겨 내려가는 충청도의 산간벽지 황무지 밖에 없던 어느 부부가 서울 답십리로 올라와 다시 또 오 남매를 낳아 꾸덕하고 찐득하게 살아갔던 삶, 치열했으리라 짐작되는 부부의 서울살이, 그들이 내 아버지에게 물려줬으리라 짐작되는 삶을, 내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면서 완벽하게 정해져 있고 완전히 벗어날 수 없던 나의 삶, 나의 일부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추적해본다.


할머니가 귀여워했던 손자의 보드라운 얼굴엔 이제 까슬까슬한 수염이 자란다. 할아버지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얼굴을 보고 싶어 했노라 짐작되는 태중 손자의 나이는 그가 세상을 떠난 만큼의 시간이 되었고, 나는 어느새 그가 살았던 날의 절반을 살았다.


아 반이나 살았네~ 아~ 반 밖에 안 살았네~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았던 서른과,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았던 서른, 그리고 나의 서른.

뭐가 하나라도 어긋났으면, 엮이지도 않았을 사람들이 공동운명체로 묶여 하나의 생명을 잉태시켜, 무언가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만드는 삶과 죽음의 순환. 할아버지 30주기 / 할머니 15주기를 치르며, 삶과 죽음 속에서 순환하는 생명의 본질 따위를 생각해본다.


<VAGABOND> / Takehiko Inoue

3.

두 분 다 우연히 춘삼월 춘분 우수 일주일의 시간 차를 두고 돌아가셔서, 우리 집안의 제사는 20세기 유교 장례문화를 21세기에 알맞게 개량하는 실험의 장이기도 하다. 4대 조상님 모시는 건 원래부터도 허세라 여겼지. 차례 핑계 대고 명절마다 제사 치르는 것도 허세다. 두 분 돌아가신 날 번갈아가며 기제사만 드리자. 앞으로 가족은 제사의 이름으로 1년에 한 번만 모인다. 바이러스가 돌아? 간소하게 차려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용하게 치르자. 너희도 잘 기억해두거라. 제사를 지내는 건 우리의 생명을 이어준 분들에게 인사하는 거다. 그거만 잊지 않으면 된다. 너희 제사 안 지내도 괜찮으니 이걸 왜 하는지만 잘 보고 간직해두거라.


세대마다 정해진 이름 쓰는 집안의 장손 치고는 너무 탈유교 맨으로 성장한 나로서는 제사의 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되는데, 집안 어른들이 이미 비판적 개량을 실험하고 있어 참 흥미롭다. 세리머니의 형식과 예법 같은 건 상황이나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를 줄 수 있는 거고. 중요한 건 역시 본질이다.

<VAGABOND> / Takehiko Inoue

4.

제사의 본질은 죽은 이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산 사람이 살아갈 마음을 북돋는 데 있다. 문을 열어두고 향을 피워두면 저승 먼 곳에서 나의 가장 가까운 이가 돌아와 불꽃이 꺼지면 망자가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 한자로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적 정보가 담긴 종이, 타오르는 지방의 소멸은 김치 유교 맨 장례 예법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추상이 현실보다 생생한 추모의 절정.

김을 작가의 불상, <라자스탄의 우물>(2020) / 보안여관

5.

앞서 밝혔듯, 작년에 삶과 죽음이 그다지 일상과 분리되지 않는 도쿄-카나가와 지역에 다녀온 뒤로 죽음을 응시하는 시선, 죽음을 다루는 기묘한 감각에 풍덩 빠져있다."당장 내일 죽게 되면? 죽는 거지 뭐" "이대로 살면 뭐... 오늘은 그럭저럭 후회하지 않으려 살았으니 당장 내일 죽어도 안타깝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 혹은 감정의 뭉텅이 실타래 (생각이라기 보단 자신감? 효능감? 아니면 태도?).


때 마침이라면 때 마침, 걸리면 당장 내일 죽을 수도 있는 폐병이 돌고 있기에, 돌연 내 숨을 빼앗을 죽음이 기습할 상황을 떠올려본다.


6.


...


죽으면 죽는데, 억지로 죽기 싫다. 그럴 필요는 없겠지.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고, 찐득하고 꾸덕한 생의 본능을 끝까지 발휘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자연수명이 다하는 날까지 천수를 누리다 팔자대로 썩어 사라지고 싶은 인류세의 호모 사피엔스이자, 피부에 날붙이에 닿으면 피가 뚝뚝 흘러 아픔을 느끼는 태양계 지구의 세포 덩어리이고 싶다.


7.

"죽음을 째려보면, 살아갈 이유 또한 명백해진다."는 결론에 도달한 2020년 3월, 삶과 죽음의 함수 곡선을 그려보는 2020년의 제사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출근길 회사 옆 도서관에서 산문집을 더듬는 기쁨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