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전환

나는 먼 미래의 나를 오늘로 끌어놓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게 아닐까

by 정필년

1.

금요일 저녁은 월급날이었고, 칼퇴근에 성공했고, 사고 싶었던 옷을 샀고, 따릉이를 타고 미지의 세계(여의도-신길역 사이 샛강 너무 매력적인 여름 숲) 를 탐험하고 집에 들어왔다. 바꿔 말하자면 주말 내내 기분이 다운될 일이 하나도 없었단 거다.


그런데 다음 날. 이상하게도 일어나자마자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테라스에 놓은 화분에 물을 주고, 화병에 놓았던 꽃다발에서 시든 꽃을 솎아내고 침대에 드러눕는다.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어 홈 오디오 스피커로 신나는 시티팝을 틀어도 기분이 나아지질 않았다. 여름에 할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일인데도.

어째서였을까. 벼르고 있던 종로 소격동 K미술관의 전시를 보려 했지만, 포기했기 때문일까. MMCA까지 장사진을 친 줄을 보고 김이 샌 건 사실이지만, 핑계를 대면 서울에 나갈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점심부터 마라샹궈를 사달라며 조르는 동생이 자기가 주문하는 가게에서 배달앱 쿠폰을 써야 한다며 조르는 게 사실 성가셨던 걸까. 그까짓 쿠폰... 모처럼 오빠 노릇 하고 싶어 쏘는 건데 왜 그런 하찮은 일에 시간을 뺏겨야 하는지 원... 마라샹궈는 맛있었다. 그러나 수저를 내려놓으면 다시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사소한 일을 하나씩 둘씩 해내도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기분이 나아지더라도 아주 일시적인 고양감에 그칠 따름이었다.


2.

주말 내내 뿔이 난 까닭을, 불만족스러운 이유를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은 굳이 길게 적어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분이나 만족감은 욕망이 드라이브한다. 좌절되거나 유예된 욕망이 무사한 일상을 건드리기도 하는데, 나는 욕망이 무절제하게 침투하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 ㅎㅎ)


노력해서 이룰 수 있는 욕망이라면 씨름해도 좋을 테지만, 시간이 해결해줄 수밖에 없는 욕망과 싸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요즘 먼 미래의 나를 오늘로 끌어놓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게 아닐까.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찾아올 리워드를 너무 앞질러 소망한다.

3.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바에 집착하지 않는 법, 함부로 무언가를 바라거나 열망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가장 좋은 솔루션에 집중하자. 지난 보름 동안 확실하게 체득한 1 옵션은 '몸에 몰두하는 일'이다. 그중에서도 요가와 무용을 통한 몰두가 으뜸이다. 신기하게도 토요일 오후부터 싹트는 지리멸렬한 감정과 어떤 권태가 일요일 저녁에 펼치는 무용레슨을 경유하면 눈 녹듯이 사라진다. 몸의 일기를 써야 한다.


4.

한 시간을 공들여 충분히 풀어준 몸으로 그날 배운 동작을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뻗어본다. 폐를 타고 순환하는 나의 호흡과 요가원에 깔리는 백그라운드 뮤직. 그 두 개만을 의식한 채, 몸은 어디론가 전개된다. 잘 펴지지도 않는 팔다리와 뻣뻣한 골반을 들고 움직여 본다. 그러면 분명 몸 어딘가가 활짝 열리는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한 동작이 아니라. 내 몸이 나아지는 느낌을 또 맛보고 싶어서 펼치는 '몸짓' 그것이 나를 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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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레슨을 마치니 오후에 내린 비가 멎고 상쾌한 여름 공기만 대기에 남아 어른거린다. 서울 하늘 공활하고 높고 구름 없이 바람이 불어온다. 얼른 자전거에 올라타야지.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여름밤>이다. 이 노래가 아니면 아무것도 어울리지 않는 한강의 여름밤이었다. 내 몸을 더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신도림역까지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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