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소설적 재현시도 <2>
지독하게 비가 내리는 계절이었다. 그 해 여름은 빗줄기가 그치질 않았다. 올여름의 비는 어떤 징조처럼 느껴졌다. 하늘은 밤낮 내내 흐렸고, 일기예보도 소용없는 소나기가 한 달째 거듭됐다. 성수동 방향으로 나아가는 2호선 열차의 궤도가 잠실철교에 올랐다. 한강 고수부지 대부분이 물에 잠겨있었다. 가는 비가 창밖을 촉촉이 적셨다.
T는 저 스스로가 날씨에 예민한 편이란 사실을 여름에서야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날이 화창하면 맑은 마음, 구름에 먹이 끼면 마음이 다소 서글퍼지는 편이란 걸 알게 됐다. 사실 하루의 운수나 그 주의 욕구는 대체로 날씨에 편승하기 마련이긴 하지만, T의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과 스케쥴러의 기록은 날씨를 정직하게 반영했다. 날이 맑을 때 부지런하게 움직여두는 T의 습관도 분명 영향을 끼쳤으리라. T는 최근 몸을 쓰는 습관을 제법 능숙하게 익혔는데, 날이 맑으면 무조건 한 시간은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거나 산책을 나서곤 했다.
T는 2호선 열차가 지상으로만 다니는 성수동 구간을 좋아했다. 빈자리가 많았지만, 일부러 문 앞에 서서 비 내리는 성수동을 내려다봤다.
- 콜라주 1
T는 이틀 치 도시락을 공유 오피스에 두고 온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 공유 주방 냉장고에 둔 샐러드는 버리기에는 아까운 싱싱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직접 싼 도시락이었다. 조금만 더 늦게 픽업해도 금방 상하는 연어나 푸성귀를 생각하면, 도무지 그대로 둘 수 없었다. 찬합을 이쑤시개로 구석구석 닦아내야 했다.
도시락은 무사했다. 뚜껑을 따도 수상한 냄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상한 기운 없는 도시락을 얼른 챙겨 먹고 건물을 나서니 지긋지긋한 비가 멈춰있었다. T는 하늘을 올려다 본채 구름이 움직이는 방향을 짐작해봅니다. 큰 구름 사이로 희끗희끗 여름 별자리가 보였다. 구름이 마포에서 합정으로, 합정에서 상암으로, 상암에서 김포 쪽으로 김포에서 서해바다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T는 버스정류장으로 가던 발걸음을 다시 자전거 스테이션으로 돌렸다. 적어도 한 시간, 늦어도 두 시간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T는 지금처럼 굵은 장맛비로 한강변이 가로막힌 상태에서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단 하나의 라이딩 루트를 떠올렸다. 연남동에서 마포종점으로 내달린다. 분명 한강으로 나아가는 수문은 굳게 닫혀있겠지만, 살짝 빠지면 한강 다리 중에서 제일 완만하고 안전한 경사각으로 라이더를 맞이하는 마포대교가 나올 것이다. 여의도공원을 가로질러 샛강 위의 문화의 다리를 건너면, 쉽고 안전하게 경인선 옆까지 붙을 수 있었다. T는 그 길을 주저하지 않고 달렸다. 홍대입구에서 여의도를 타고 신도림역까지 달리면 정확히 한 시간이 걸렸다.
기나긴 장마는 T의 낙을 빼앗던 터였다. 하루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세모난 안장 위에 엉덩이를 기댄 채 바퀴를 굴리는데 집중하는 시간을 그는 사랑했던 것이다. T는 기대도 안 했던 퇴근길 라이딩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끼며 신도림역 자전거 거치대에 반납을 마쳤다.
그리고 T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크게 한번 심호흡했을 때 느끼는 것이, 어쩌면 어떤 직관이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감흥으로 이끌어준다고. T가 고른 길은 그가 지난 일 년 간 매일매일 서울 어딘가를 들쑤시며 발견한 길이며, 여러 가지 가능성을 하나로 연결지으며 만든 합리의 길이었다.
비바람이 몰아친 흔적이 가득한 길 위에서도, 세상이 온통 야단법석이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 T가 짧게 밟은 라이딩 루트에 있었다. T는 T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목적지를 향해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의 자신감. 모든 경우의 수를 따졌을 때,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안정감, T는 저 스스로가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진정으로 기쁨을 느꼈다. 우연과 즉흥에 기댄 라이딩이 아니란 사실이, 서울 구석구석을 제 몸처럼 느꼈다는 감각이 그를 환희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 콜라주 2
"이렇게 지독하게 비가 내리는 계절은 태어나 처음 맞이하는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장마가 아니라 우기가 찾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날씨가 바뀐다는 건 날씨를 받아 사는 사람들의 생활이 바뀐다는 뜻이에요. 습관이 바뀌고, 심지어 성격마저 바꿔버리죠."
"그게 무슨 말이야?"
"빗줄기가 제일 먼저 쓸어가는 건 고단한 사람들의 삶이에요..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 사람들, 안식처가 위태로운 사람들, 타인의 인정이 곧 돈이 되는 사람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나가야 숨 쉴 수 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쓸려나가요. 기둥뿌리부터 뽑혀 물살이 거친 강물로 빨려 드는 나무를 보며, 기둥뿌리를 어떻게든 지켜내려 애쓰는 얼굴들을 상상해봤어요."
T는 달리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으나, 말의 끝이 궁금했다.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건 진짜 흥미로운 말을 귀담아듣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T가 펼치는 오랜 버릇이기도 했다.
"저 또한 고단한 편에 속하는 편이에요. 빗줄기가 거세도 쓸려 내려가지 않는 법을 염려하고, 빗줄기에 구애받지 않는 법을 고민하는 편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두는 날도 있을 겁니다."
- 콜라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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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콜라주 쪽 글. 8월의 어느 날, 강남역에서 6시 반에 탑승해, 2호선을 빙글 돈 뒤, 한강을 가로질러 다시 2호선으로 갈아타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끄적인 글이다. 소설이라 하기엔 형식 없이 독백으로 가득 차 있고, 산문이라 말하기엔 바라본 것을 제법 열심히 묘사하고 있다.
스타일을 의식하지 않고 전개할 때, 나의 글쓰기는 언제나 이런 식인 거 같다. 하지만, 요즘 들어 이런 글쓰기를 좀 더 써보려 한다. 일과 무관하고, 의도를 가진 창작물과도 연결되지 않는 글쓰기. 오직 보고 느낀 것을 붙잡아 두려는 글쓰기를 해보려 한다. 일할 때 발휘하는 글쓰기와 창작용 글쓰기 모두에 이롭지 않을까요? 누가 시켜서 쓴 것도 아니고, 딱 이만큼이면 만족한다 싶을 때 그만두는 글, 그런 글을 많이 남겨보고 싶다. 관점을 잡아 묘사하는 글, 대화를 재현하는 글, 흐르는 시공간을 붙잡는 글. 그런 글이 좋아서 쓰는 글, 저절로 쓰고 마는 글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