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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필년 Feb 26. 2021

봄구경하는 시선과 어복쟁반

흥성흥성 서울에 봄이 어리었다



어복쟁반을 먹으러 간다. 어복쟁반은 작년에 처음먹어 본 한반도 북쪽의 전통음식이다. 우리회사 디자인 팀장님은 평양냉면을 비롯한 이북음식을 무척 좋아했다. 팀장님 생일날, 회사 근처에 있는 평냉음식점에서 우리는 다같이 어복쟁반을 먹게됐다. "아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북쪽 사람들만 즐기셨다구요?"

전골냄비 안에 보글보글 놓인 어복쟁반 수육은 잔불에 오래 익혀먹을 수록 맛이 진해지는 요리였다. 채수와 양지육수가 쫄아들수록 고기는 진한 감칠맛을 머금었는데, 배가 부를 수록 맛은 더욱 선명해지는 신기한 요리였다.

그런 내가 어복쟁반을 또 다시 먹게 되는건 그저 유튜브에서 만났을 뿐인, 그러니까 트렌드 리서치 회사의 MZ세대 리포트처럼 자신의 삶이 곧 삶의 유희로 전환시키는데 능숙한 어느 젊은 친구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덕분이었다. 수요없는 공급을 펼치는 유튜버였다. 자기가 좋아서 하는 영상을 비정기적으로 올리는 친구였는데, 나는 그가 편집해서 올린 리액션영상이 너무 즐거워서 몇번이고 돌려봤던 차였다. holy shit이라 느끼면 그대로 홀리~쓋이라 내뱉고, 웃을만하면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짓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알고리즘이 연결한 콘텐츠는 크리에이터의 계정을 팔로잉하게 만든다. 그는 어복쟁반을 함께 먹으러가 N빵할 불특정다수를 원했고, 나는 그가 만든 스토리에 손을 번쩍 들어 응답했고, 그는 자신의 친구와 친구가 모인 단톡방으로 초대해 4인의 어복쟁반 원정대가 결성됐다. 목표는 강남구 평양냉면의 성지, XX평양냉면집. 언덕이 볼록 튀어나온 신논현과 청담동 사이의 강남구청역 인근 도로는 오늘도 여전히 북적인다. 지긋지긋한 풍경이지만, 따뜻한 봄날씨가 지루한 풍경에 특별한 감흥을 줬다. 오늘은 술이 술술 들어가겠어.



선발대로 다녀왔던 사람이 있어 주문을 리드했다. 평양냉면 2그릇을 시켜 넷이서 나눠먹고, 어복쟁반은 小짜로 시킨다. 과연 그의 말대로 小짜도 제법 양이 넉넉했기에,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모자람없이 즐겼다. 소주없이 맥주만 깠는데, 무려 업소용 병맥주 열병을 깠으니 술도 제법 넉넉히 마셨다. 병따개 없이 기깔나게 맥주를 잘까던 유튜버의 친구는 삐에로씨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눈썹이 없는 그의 얼굴은 삐에로 메이크업의 흔적일까.

깨끗한 두피, 미끈한 모발~모발. 시원한 스킨헤드를 지닌 삐에로씨는 에로에로한 삐에로로서 웃음과 농담을 선사하기 위해 펼쳤던 많은 에피소드를 술잔과 함께 털어놨다. 자신은 일평생 다양한 직업을 가져왔고, 언젠가 어덜트 토이 회사에서 일했는데, 연인을 위한 젠가게임이 클라우드 펀딩에서 기대이상의 성과를 얻었다거나, 삐에로 키다리를 술마시다 잃어버려 시무룩해졌다는 에피소드를 지루하지 않게 들려줬고, 나머지 세사람은 그런 에피소드에 딴죽을 걸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삐에로씨가 하필 사회에서 만나기 힘든 나의 대학동문이란 것도 금방 의기투합하게 만드는 옵션이었다. 다들 미쳤어...미친 사람들이구나 그리고 나는 오늘 좀 미치고 싶었어...



"제가 얼마 전에 친구랑 방을 새로 구해서 이사를 했단 말이에요. 자취방 위치가 서로 비슷해서 제가 친구네 부모님이랑 이사를 도와줬단 말이죠. 근데 친구나 저나 그림그리는 사람이여서 화구를 정리하고 있었어요. 근데 제 친구 화구를 부모님이 열었는데 뭐가 나왔는지 알아요?"

"ㅋㅋㅋ...아 미친 상상도 안 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성인용품이 짠 나오는 거야. 콘돔이랑 우머나이저랑 기타 등등...근데 여는 순간 친구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거예요."

"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안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어떻게 했어? 어떻게 했는데?"

"아닠ㅋㅋㅋㅋㅋㅋ그거 나도 모르게 덥썩 손에 잡아채고 '제 꺼예요'라고 말했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건 찐이야."

"우정이네 우정 그자체여"

"너님의 고결한 희생에 박수를..."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우정의 용사는 콘돔 세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흔들었다. 우리는 한바탕 크게 웃었고. 그 콘돔 세개는 내 손 위에 꼭 쥐어져 나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게 됐다. TMI인지 조언인지 알 수 없는 코멘터리와 함께.

"그거 머리 부분에 특수처리 들어간거라 평소보다 오래할 수 있게 되는 거래요."

어...그래 말해줘서 고마운데, 아까 말하지 제발 왕십리역 지하철에서 또 한번 큰소리로 말하지 말아줘 ㅠㅜ... 내 손에 쥐어진 콘돔 세장은 성인의 건강한 교제를 기원하는 부적이 됐다. 음...그렇게 받아들여야 할 거 같다. 


반나절을 즐겁게 먹고 마셨던 어복쟁반 원정대는 슬슬 각자 갈 곳을 잡아 헤어진다. 호스트인 유튜버씨는 기분좋게 취했고, 삐에로씨는 전날 개인작업 마감을 치르느라 잠을 많이 못자 집에 얼른 들어가겠다고 했다( 그 와중에 집에서 월남쌈을 해야한다고 장을 봐야한다고 했다. 당신은 도대체...) 삐에로씨의 친구인 디자이너씨는 코앞이 집이라 말했다. 유튜버씨는 원래 주량이 세지않아 집에가서 얼른 쉬고 싶다고 했다. 


셋에 비해 텐션이 좋았던 나는 에너지가 넘쳐서 조금 더 움직여보기로 한다. 신촌역을 목표로 잡았다. 무인양품 뉴 시즌 컬렉션이 입고됐다는 소식을 어젯밤 인스타그램에서 체크했기 때문이다.

모처럼 올라간 신촌역은, 내가 너무나 좋아했던 활기로 가득하다. 코로나 쇼크로 급격히 유동인구가 줄어드는 스팟이여서 지나갈 때마나 걱정이 많았는데, 모처럼 흥성흥성 붐비고 있었다. 홍익문고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두리번 거리는 시선, 투썸플레이스에서 케이크를 뭉갠채 수다를 떠는데 정신이 없는 커플, 주말을 맞아 차없는 거리로 변신한 신촌한복판을 무시로 사람들이 횡단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 날씨가 좀 좋아야지. 오전부터 기세등등하던 미세먼지는 바람과 함께 멀리 날아갔는지, 해가 저물며 제법 공기도 깨끗해지고 있었다.


이럴 때는 얼른 자전거를 뽑아 한강 쪽으로 나서는 게 낫다. 패달을 거의 밟지 않고도 한강까지 스무th하게 흘러갈 수 있는 신촌오거리-신수동-용강동 골목길로 내려가다보면 금새 마포대교까지 닿게 되는데, 거기서 바라본 저녁노을의 그라데이션은 맥북바탕화면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카메라로 아무리 열심히 담아내려 해도 담을 수 없는 저녁노을의 완벽한 그라데이션이 펼쳐지고 있었다. 일년에 한두번만 감상할 수 있는 노을이, 여의도 하늘 위에, 새로 오픈을 준비하는 여의도 현대백화점쇼핑몰과 국회의사당 위에서 꿀렁꿀렁 일렁이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영하 십도로 내려가는 혹한은 더이상 오지 않을 것이란 것. 바람이 선선하고 약간의 한기가 도는 날씨가 이어지리란 것. 그래서 깔맞춤이 좋은 옷을 레이어드로 껴입고 싶어질 것이란 것. 봄에 느낄 수 있는 감흥을 올해는 더 잘 캐치해보고 싶단 생각을 하며 영등포역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갔다.




함경도의 혹한기에 익숙했기 때문일까. 20세기 초를 살던 백석은 이렇게 말했다.


"봄의 그 현란한 낭만과 미 앞에 내 육체와 정신이 얼마나 약하고 가난할 것인가. 입춘이 와서 봄이 오면 나는 어쩐지 까닭 모를 폐부의 그 읍울을 느끼어야 할 것을 생각하면 나는 차라리 입춘이 없는 세월 속에 있고 싶다."


석이형! 겨우내 게으름 피우던 육체와 정신을 새삼 느끼면 슬퍼지지만, 봄의 로오오오망과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여태까지 버텨냈던 거라구요!



또 백석은 <입춘>이란 소박한 수필에 이렇게 적고 있다.


"그동안만 해도 제법 봄비가 풋나물 내음새를 피우며 내리고 땅이 눅눅하니 밈이 들고해서 이제는 분명 봄인가고 했는데..."

땅이 눅눅한데, '밈'이 들어? 오타가 아닌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니. 백석이 꺼낸 '밈'은 봄가을 생나무껍질과 나무사이에 생기는 진득한 액체를 뜻한다고 한다. 어원의 본디 맥락은 탈락시킨 채 유희만을 위해 쓰이는 '밈meme'. 유튜브를 떠돌면 이따금 만나는 무~야호같은 아무말대잔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뜻을 알고 나니 무척 마음에 드는 단어다.


"며칠 내 마치 봄날같이 땅이 슬슬 녹고 바람이 푹석하니 불다가도 저녁결에나 밤사이 날새가 갑자기 차지는가 하면 으레이 다음날은 대한이 으등등해서 왔다."


그는 뭔가를 느꼈을 때, '푹석하다'고 말하는데, 푹석푹석하다는 건 폭신폭신하다는 것과 말랑말랑하다의 사이쯤을 뜻하는 걸까?나는 그런 어감으로 느끼고 있다. 설령 내 뜻이 틀렸다해도 그렇게 느끼고 싶다. 낯선 우리말을 발견했다.

봄을 감각하는 낱말을 발견하자. 봄을 닮은 식물을 심어 싹을 피우자. 너무나 오래 기다려 왔던 봄이. 새롭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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