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열등감이 많았었다. 공부를 잘하고 행동이 당당한 친구들을 보거나 고급 주택가에 살고 있는 친구들을 볼 때면 괜히 주눅이 들곤 했다. 어느 때는 그 열등감이 저들을 이겨야지라는 긍정적인 동기부여가 되어 가끔은 시험성적으로 앞서는 짜릿한 순간도 경험했지만 대부분의 시간들은 그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지낼 때가 많았었다. 길었던 학창 시절을 뒤로하고 어느덧 중년이 되어 생활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동기 모임을 갖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사회생활 대부분을 지방에서 보내고 늦게 상경한 터라 동창회 챙길 생각을 못했는데 우연찮게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마침내 동창회 날이 되어 장소에 가니 익숙한 얼굴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서로의 이름과 얼굴을 아는 이는 둘 정도였고 나머지는 희미하게 얼굴 정도만 익은 이들이었다. 그런데 눈에 확 띄는 친구가 있었다. 나와 같은 반은 아니었기에 알고 지낼 기회는 없었지만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넘사벽의 친구였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했고 키도 크고 인물도 좋으면서 운동 잘하고 성격도 좋아 나에게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그 친구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졸업 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보통은 고시 준비를 하지만 처음부터 고시에는 뜻이 없었다며 자신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사정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는 중증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는데 사정상 동생을 자기가 돌봐야 하기에 판검사와 같은 공무원의 월급으로는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어서라고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돈을 많이 주는 삼성전자에 입사를 했고 어느 정도 근무하다 휴대폰 관련 아이템을 하나 들고 나와 지금은 중소기업을 경영하고 있다고 했다. 삼성전자라는 원청이 든든한 덕에 사업은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그런 사정이 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는 나에게 좋아 보였던 친구였지 속사정을 알고 보니 상황이 좋았던 친구는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 스스로 느끼는 인생의 무게가 상당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사정이 그런데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끊이지 않았던 그가 참 대단해 보였다. 지금은 그 친구가 더 이상 부럽지도 않고 동경의 대상도 아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은 학창 시절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여겼던 그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열등감은 비교를 할 때 생겨난다. 존재 자체는 잘 난 것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지만 다른 무언가와 비교를 하게 되면 크다 작다, 많다 적다, 잘한다 못 한다로 구분된다. 또한 인간의 열등감을 분석해 보면 남보다 더 잘나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생겨난다고 한다. 즉 열등감은 우월감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치가 이러하니 내가 누군가 보다 잘 나고 싶고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개인의 열등감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부작용도 있는 것 같다.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는 동기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산속의 수행승도 아니고 이래서야 되겠는가. 이럴 때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나 자신과의 비교이다. 오직 나의 어제와 비교하는 것이다. 어제보다 좀 더 나아졌다는 것이 반복될 때 개인의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
존재 자체는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다. 그것이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성철 스님의 비유기도 하다. 법륜스님은 이것을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신다. 똥이 방안에 있으면 오물이지만 밭에 있으면 거름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똥은 그 자체로는 오물도 거름도 아니며 오직 똥은 똥일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 말이 ‘산은 산, 물은 물’과 같은 뜻이다. 존재는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이 살면서 이런 마음의 중심을 하나 품고 있으면 쉽게 흔들릴 것 같지 않다. 좋은 일에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안 좋은 일에도 낙담하지도 않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삶을 참 편안하게 사는 사람일 거다. 나는 이런 사람이 좋아 보인다.
그러면 어떡하면 그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결국 마음(心)의 문제라 여겨진다. 내가 내 마음의 고삐를 잘 쥐고 있으면 크게 흔들림이 없겠지만 어느 순간 고삐를 놓쳐버리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송아지처럼 희노애락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따라다니는 것인데 오직 즐거움만 취하겠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살면 좀 밋밋하고 재미는 없어 보인다. 범부중생으로 살면서 일희일비(一喜一悲)는 어쩔 수 없다 해도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슬퍼하는 극희극비(極喜極悲)는 좀 피해 가며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