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저물고 있다. 엊그제 사업을 하는 한 지인을 만났다. 많이 힘들어 보였다. 도와줄 형편은 못되어 그냥 듣고만 있었는데 이 고비만 넘기면 활짝 열린 대로변이 나올 것 같은 희망 섞인 이야기도 했다. 어려운 가운데 동업자와 함께 압구정에 새로이 매장을 하나 더 오픈했는데 매출도 늘어났지만 투자가 더 늘어난 탓에 당장은 어려운 상황인가 보다. 지금껏 큰 아쉬움 없이 살았던 분인데 투자시기가 하필 올해 코로나 시기와 맞물려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어 보였다.
그를 보내고 나서 소득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50대 중반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나이는 아닌 것 같다. 그냥 지금껏 하던 일의 범위 내에서 그 소득에 맞게 살아가는 생활수준일 것 같다. 사회에서는 에듀푸어, 하우스푸어, 카푸어 등 각종 Poor를 이야기한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스스로를 가난하다고 자조적인 평가를 내리는 경우이다. 나의 경우 사업수단이 있어 큰돈을 벌 것 같지는 않지만 아이들의 대학 졸업 정도는 시킬 것 같다. 자식이 성인이 되었을 때 가장 원만한 관계는 ‘내 자식이지만 남의 자식 대하듯 하는 관계’라고 한다. 20대인 내 아이들과는 서로가 어른으로 대하며 존중하되 부담도 주지 않는 그런 관계를 원한다.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 깔끔하게 굴러만 가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애당초 카푸어는 나와는 거리가 멀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다가 50대는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정할 때’라는 것을 보고 나만의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한 마디로 ‘나는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나를 먼저 배려하는 사람’이었다. 일단 내가 행복해야 나의 가족들에게 편안한 여건을 만들 수 있고 직장 내 일이나 관계에서도 원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억지로 나를 희생시켜 누군가를 위한다는 것은 일단 내 방식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금전적 후원 수준이지만 만일 내가 직접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 역시 내가 하고 싶어 하는 행위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이기심이다.
그리고 예전과는 달리 50대 들어 달라진 한 가지가 더 있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면 안 되는 것을 기어이 해내려고 애쓰지 않게 되었다. ‘때가 아닌가 보다’로 여기거나 그 사람이 옳을 수도 있지라며 흘려보내는 성향이 좀 생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니 마음이 좀 더 편하고 여유로워진다.
이제는 죽음이라는 철학적 문제에도 관심이 간다. 개인적인 사고 경험도 있었지만 이미 고인이 된 벗들도 생겨나고 주변에 치매에 걸린 노인들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데 막연한 두려움만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요즘 불교적 가르침과 철학에 마음이 가는 이유인가 보다. 하지만 삶의 열정까지 식은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열정과 좀 다른 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전제를 두고 좀 더 의미 있는 삶에 대한 열정이길 바란다. 그래서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에 나의 인생 후반전도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냈어라는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