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소설에서의 서술방식인데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에서 소설가가 스토리의 전개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이런 소설 작업을 할 때 작가는 등장인물의 생사여탈권을 가질 뿐만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도 관여하니 스스로 대단한 힘을 가진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겠다. 삼일절 연휴의 첫날이었지만 결혼식을 포함한 행사가 무려 세 건이었다. 그것도 지리적으로 끝에서 끝을 오가야 할 만큼 떨어져 있어 제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싶었다. 앞의 두 건 결혼식 행사는 그럭저럭 맞출 수 있었는데 마지막에 결국 일이 터졌다. 기온이 많이 오른 탓인지 나들이 차량이 붐벼 도로의 통행이 도통 움직임이 없었다. 이럴 때 내가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가가 되어 앞의 차량들을 모세의 기적처럼 양쪽으로 쫙 열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가가 아니라 일개 등장인물에 불과한 것을. 마음 태우며 있다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했다. 마지막 일정은 대학원 원우회에서 주관하는 시와 소설 낭독회였다. 코로나 시대라 진행방식을 줌으로 하게 되어 아쉽다는 얘기들이 오가던 참이었다. 게다가 나는 낭독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도 예정되어 있어 뭔가를 하기는 해야 했다. 휴대폰을 꺼내어 줌에 연결하고는 자동차 대시보드 상판에 거치했다. 그다음부터는 몸은 막힌 도로에 있었지만 마음이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목소리 참여도 하고 다른 낭독자들이 읽어주는 작품 감상도 하면서 운전을 하며 집으로 왔다. 다행히 집에 도착할 즈음 내 순서가 도래되어 마지막 행사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비대면 화상회의나 모임이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지만 문학의 밤 행사까지 이렇게 화상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전 준비작업에 참여해 의견 조율도 하고 진행 방식에 협의도 했지만 실제 참여해 보니 긍정적인 효과가 적지 않다. 이제 코로나 핑계로 만나지 못한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 모두가 아는 사실은 상식이니까. 이제 온라인으로 만나면 되니 문제는 만날 의지가 있느냐일 뿐이다. 어제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낭독회에 접속해 행사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다. 이제 시대가 달라졌다는 말은 식상한 말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서서히 이 상황에 적응해 가고 있으며 일상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어제의 첫 행사였던 친구의 딸 결혼식도 인상적이었다. 소수의 하객들을 초대 형식으로 진행하는데 사전에 청첩장과 함께 참여 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 당연 참석하겠노라고 했다. 도착하여 친구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니 예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연회장으로 안내를 받았다. 내 이름과 함께 원형 테이블이 지정되어 있고 자리에 앉으니 실시간 유튜브 결혼식 접속 주소를 메시지로 받았다. 테이블에 앉아 각자의 휴대폰으로 결혼식을 보았다. 예식이 거의 끝날 무렵 음식들이 테이블에 세팅되기 시작하고 참석한 우리는 달라진 예식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가는 곳마다 QR코드를 찍어야 하고 체온을 검사받아야 하며 비대면으로 많은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 예능 방송의 경우 1회분의 방송 분량을 찍는데 12시간을 촬영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완성도 있는 비대면 모임을 하나 치르는 일도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다. 세상의 기반이 흔들리는 전 세계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간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다. 권력의 크기만큼 공간을 차지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면의 사회에서는 한 곳에 모여 공간을 많이 차지한 권력자의 존재를 느끼지만 비대면 회의에서는 사장님도 화면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는 참석자에 불과하다. 코로나 사태로 우리는 중앙 집중화된 권력의 붕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지금의 나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러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전지적 작가 시점의 삶을 현실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