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소설가 소노 아야코의 글을 읽다가 아주 흥미로운 관점을 접했다. 그녀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악설을 신뢰한다고 했는데 긍정적인 그녀의 글들과는 상반되는 입장이라 조금 이상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인간에 대해서는 성선설보다는 성악설을 믿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뉴스 채널만 봐도 인간이 선하다는 전제를 가지면 실망스러운 내용들이 가득하지만 악하다는 관점이면 그래 원래 그런 인간들이니 저런 일도 가능하구나라고 담담하게 보게 된다. 그러다 가끔 인간의 선한 행위를 접하기라도 하면 어떻게 인간이 저리 훌륭한 일을 해내지라며 감동할 수도 있다. 내가 마주한 사람에 대해서도 선하지 않다는 전제를 가지면 사전에 경계하여 방어가 되지만 마냥 선하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뒤통수를 맞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인간 심리의 디폴트 값은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세팅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해 보인다.
이런 맥락이면 ‘인간은 누가 뭐래도 동물이다’라는 관점을 가지는 것도 유용할 것 같다. 동물들에게는 두 가지 큰 본능이 있다. ‘개체 보존의 본능’과 ‘종족 보존의 본능’이다. 개체 보존의 본능은 생존 본능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이 생존하는 것과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길게 남기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를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성의 권력욕은 동물의 세계에서 우두머리 수컷이 누리는 여러 혜택들을 노림이고 부모가 무리를 해서라도 자식을 유학 보내고 더 가르치려 하는 것은 좀 더 유리한 환경에서 내 유전자를 남기려는 의도로 보는 것이다. 어떤 때는 동물이 인간보다 나아 보이는 경우도 있다. 동물은 자기 배가 부르면 먹다 남은 것을 다른 동물들이 먹더라도 개의치 않지만 인간은 버릴지언정 남에게 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그렇다. 남한에서는 아무리 남아돌아도 북한에 지원하기는 꺼린다. 이념과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와 언어가 통하는 많은 인간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도 악한 본성으로 무장하고 동물의 두 가지 본능에만 충실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건 좀 다른 문제이다. 상대를 대할 때는 성악설과 동물적 본능에 충실할 것이라 여기면 크게 실망할 일이 없지만 나는 선한 인간성으로 상대를 대하는 게 유리하다. 왜냐하면 상대는 나를 선하지 않고 동물적 본능에 충실할 거라고 별 기대가 없었는데 의외로 나의 선하고 따뜻한 인간성을 보게 되면 그의 숨겨진 선함과 인간성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세계가 동물의 세계가 될지 인간의 세계가 될지는 결국 각 개인들에게 달려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