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하지만 세상에 이름이 없어진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 만물에 이름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한 상황들이 벌어질지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단어 하나를 제시하고 다양하게 묘사하는 게임처럼 하나의 대상을 두고 다양한 설명들을 해야 할 것이다. 사전적 정의도 재미난 일이 벌어질 것 같은데 이를테면 ‘책’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자.
‘책’ =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
여기서 이름에 해당하는 명사를 골라내면 ‘종이, 장,물건’ 이 보인다. 이것들을 다 제거하고 ‘책’이라는 단어를 다시 본다면,
‘책’ = ~를 여러~ 묶어 맨 ~
이리 봐서는 도대체 ‘책’이 무엇인지 알 방법이 없다. 이번에는 ‘마음’이라는 추상명사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마음’ = 사람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감정이나 의지, 생각 따위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작용이나 태도
역시 명사를 다 제거해 보았다.
‘마음’ = ~이 다른 ~이나 ~에 대하여 ~이나 ~, ~를 느끼거나 일으키는 ~이나 ~.
마치 외계어 같다. 추상명사 자체를 설명하기도 만만치 않은데 그것에 명사를 제거하니 오죽하겠는가. 이처럼 이름 없는 세상은 여러모로 혼돈의 세상이 될 것 같다. 어쩌면 이름이란 모든 것의 경계를 만드는 근원적인 작업일지도 모른다.
눈앞의 사과를 본다. 사과에도 사과라는 이름이 없고 나도 이름이 없는 상태에서 사과를 보니 이전의 사과와는 좀 다른 느낌이 든다. 이름이란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사과라는 이름은 한국 사람에게는 통하지만 미국인에게는 ‘애플’이라고 해야 하고, 러시아인에게는 ‘야블라꼬’가 된다. ‘사과, 애플, 야블라꼬’처럼 대상은 같지만 그것에 붙인 이름이 다르다 보니 러시아인에게 ‘사과’라고 하면 ‘사과’를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남들이 나를 규정하는 역할에 따른 이름들을 제거해 보자. 아빠, 직장인, 아들, 손님, 남편, 친구, 유권자 등 나의 역할에 따른 이름들을 제거해 본다. 그동안 관계로 인해 나를 규정하는 다양한 이름들을 제거해 보면 이제는 나 자신을 규정하기가 더욱 애매해진다.
이번에는 나에게 이름이 없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 나의 이름은 어느 작명가가 지었다고 한다. 평생을 함께하고 있는 나의 이름이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어떤 사람이 붙여 준 것이었다. 이제 그 이름을 제거해 보자.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이름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질문을 받았다 치자. ‘너는 누구인가?’
갑자기 나를 설명하기가 대략 난감해진다.
‘나는 중년의 나이 든 남자 사람’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삼자가 이렇게 설명하는 나를 다른 사람과 구분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눈을 감고 이름 없는 나 자신을 느껴본다. 숨소리가 느껴지고 눈을 감았으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귀에 들리는 벽시계 소리, 거실의 온도감, 냉장고의 윙하는 소리 등 나의 이름이 사라졌다고 여기는 순간 다양한 것들이 느껴진다. 그동안 이름으로 규정되는 나와 주변의 경계가 있었다면 이름이 없어졌다 여기니 스스로가 모호해지면서 경계들이 사라지고 주변과 일체감 같은 것도 느껴진다.
눈을 감고 나의 이름을 떠올려 보고는 이제 그 이름을 한 자씩 지우는 상상을 해 본다. 어쩐지 내가 확장되면서 천천히 명상의 상태에 접어드는 느낌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