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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by 장용범

10년도 더 된 일이다. 하루는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가는데 우연히 전단지 하나를 건네받았다. 근처 요리학원에서 나눠준 전단지로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을 이용한 요리수업을 홍보하는 전단지였다. 1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직접 요리를 만들고, 그 요리로 점심까지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호기심에 한 번 해볼까라는 마음이 생겨 퇴근길에 등록을 했다. 당시 무엇을 만들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뜨거운 냄비 앞에서 어색한 앞치마를 입고 따라가기 급급했던 기억이 있다. 왠지 쑥스러워 동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는데 점심시간만 되면 어디론가 사라지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렇게 3개월 정도 요리학원을 다녔었다. 그 후 한 동안 잊고 지내다가 국비지원 내일배움카드를 발급받아 요리학원을 다시 다니게 되었고 주로 한식 위주로 과정을 수료했다. 이제는 칼이나 식재료를 다루는데 어색함이 덜하고 레시피를 보면 대강 어떤 식으로 조리과정이 진행되겠다는 그림도 그려지는 편이니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최근에는 좀 특이한 증상도 나타나는데 식당에서 음식이 맛있다 싶으면 ‘어떻게 만들었지? 만들어 볼까’라는 마음도 생기니 나의 요리능력에도 상당한 진척이 있어 보인다.


내가 다시 요리를 배우게 된 계기는 좀 특이한데 이연복 셰프라는 분이 TV에 나와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서다. 그는 젊은 시절 대사관의 요리사로 근무했는데 어느 날 나이트에서 신나게 놀다가 밤을 새우고는 다음날 아침 출근을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대사는 아침을 굶은 것이다. 점심 무렵 출근을 해서 대사를 찾아갔더니 얼마니 화가 났던지 별이 번쩍할 정도 뺨을 한 대 때리더라고 했다. ‘감히 네가 대사의 밥을 굶겨’라는 마음이었겠지. 그 말을 들으니 아침을 굶고 붉으락 푸르락 앉아 있는 대사의 모습이 연상되어 웃음이 절로 났다. 그런데 그때 드는 생각이 남자가 요리를 할 줄 안다는 것은 혼자서도 먹고살 수 있는 독립의 능력을 갖추는 일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의 생명체가 먹고사는 일은 생존의 기본 활동인데 그 중요한 일을 나는 지금껏 남의 손을 빌어 해결해 왔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요리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서게 된 것 같다. 목적이 명확하니 자격증 따위는 관심 없고 오로지 생활요리를 중심으로 배우게 되었다.


이 말은 내가 요리를 배운 목적이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였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리를 하게 되면서 생각지 못한 좋은 점이 생겼다. 아내와 식재료나 음식을 주제로 대화가 늘어난 것이다. 삼시세끼는 매일 일어나는 활동이다 보니 만들고 먹고 정리하는 일은 일상이기도 하다. 그러니 자연스레 대화가 늘 수밖에 없다. 주방일이 낯설지 않게 되니 아내와 정말 사소한 대화가 계속 일어난다. 칼날이 무디다, 대파 값이 너무 비싸다, 간장을 새로 사야겠다 등의 이야기는 내가 요리를 배우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대화거리이다. 요즘엔 아내와 함께 마트에 가면 나는 식재료에 자꾸 손이 가고 아내는 말리는 기현상도 벌어진다.


주말에도 직접 만든 팔보채와 해물찜을 가족들과 먹고 있는데 아내가 보기에도 이 상황이 우스운지 한 마디 한다. 자신이 전생에 나라를 구했는지 내가 하는 요리를 주말마다 먹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그래 그럴 만도 하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못마땅해하실 것 같았던 어머님도 나에게 요리 참 잘 배웠다고 하시는 걸 보면 여자들은 모두 비슷한 생각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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