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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면

by 장용범

어느 날 문자 메시지가 왔다. ‘당신의 남은 수명은 00년 0개월입니다.’ 다소 황당한 상상이지만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영화의 설정이다. 세상에는 모르는 게 나은 경우가 있는데 남은 수명이나 미래에 벌어질 일도 그런 것 같다. 내 의지가 개입할 여지도 없이 미리 정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는 건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기 때문이다.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1년 후 입사시험의 결과가 합격이라고 알고 있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그는 시험 전날까지 마음의 여유를 부리며 놀게 되지 골치 아프게 시험 준비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일주일 후에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물가에는 얼씬 거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러면 뭔가 좀 이상해 진다. 인과관계가 틀어지기 때문이다. 시험준비를 안 한 사람이 합격을 해야 하고 물가에는 가지도 않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야 한다.


그러면 이리 볼 수도 있다. 사람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다만 신만이 알 수 있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갈 뿐이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하는 설정이지만 이것도 좀 이상하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로 선택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신을 죽여야 했나 보다. 신이 죽어야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유의지를 지닌 주인 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는 이미 정해진 미래가 없어야 오늘을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나의 미래가 달라진다는 전제를 둘 때 힘들지만 뭔가를 위한 노력도 하게 되고 돈을 아껴 저축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결정론적 운명관은 이래저래 문제가 많은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상황을 보면 점점 결정론적 운명의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명의의 집을 살 수 없고 아무리 취업 준비를 해도 실업자가 될 수밖에 없다면 그 결과가 이미 정해진 것과 다를 바 없어서다. 이런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마치 자신의 운명이 어떠리란 걸 알고 있는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번 생은 글렀다며 조용히 받아들이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수용하기 싫은 운명을 정해준 신에게 화를 내듯 이 사회를 향해 분노를 표출할 것 같다. 이는 개인의 자유의지가 아무런 소용이 없고 무얼 해도 그 결과는 이미 정해졌다고 여겨지는 사회가 불안한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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