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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 인간 기억의 역설

by 장용범

깜빡했다는 말을 한다. 기억을 못 했다는 것이다. 한 인간의 정체성은 그가 쌓아 올린 기억의 집합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만일 인간에게 기억이 남아 있지 않다면 스스로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싶다.


치매에 걸린 노인들의 대표적인 증상이 기억능력에 장애가 있다는 것이니 그들을 통해 기억능력과 개인의 정체성을 연결 지어 보았다. 치매가 심한 노인들은 본인이 식사를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 해 계속 음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고 대화 중에도 자주 누구냐고 묻기도 하는데 일단 치매에 걸리면 단기 기억에 손상을 받는 것 같다. 방금 일어난 일도 기억하지 못하니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 그런데 오래된 기억은 있는 것 같은데 가끔 옛 일을 회상하는 말로 보아 장기기억은 치매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작동이 되는 것 같다.


이처럼 치매 노인들의 상황을 보면 기억 기능은 한 인간의 연속성과 정체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치매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일생을 통해 쌓아 올린 자신의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인 것 같은데 개인에게는 죽음보다 못한 상황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말년에 알츠 하이머에 걸려 부인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하니 만일 멀쩡한 정신의 그가 알츠 하이머에 걸린 자신을 본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사람의 일생을 한 편의 영화에 비유해 본다. 영화라는 동영상을 천천히 진행해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나열된 것을 볼 수 있다. 기억을 그 사진들에 비유한다면 기억장애란 중간에 사진들이 빠져버려 영화가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호해진 상황이다. 인생이라는 영화가 기승전결로 매끄럽게 이어질 걸로 기대했는데 마지막 영상이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 노인의 치매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든다. 그건 제삼자가 바라본 치매 노인의 삶이고 정작 그 자신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자신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자각이 없으면 별로 괴롭지는 않을 것 같다. 과거 수학 교수를 지낸 분이 치매에 걸려 1+1을 새로 배운다고 해도 스스로가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어 자각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상황이 문제 될 것 같지는 않다. 달리 보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평온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인생이라는 한 편의 영화를 찍었고 그 영상을 다 날려 버렸다고 해도 정작 새로 시작하는 본인에게는 문제 될 게 없지만 그 영화를 기억하는 제삼자가 보기에는 괴로운 것이다. 이리 보면 인간의 기억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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