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요망”이라는 문자가 찍혀 있었다. 개인적으로 형 동생처럼 지내는 옛 상사 분이셨다. “무슨 일이시지?” 궁금함에 전화를 드리니 대뜸 “야, 너는 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지?” 거의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는 사이지만 최근 감사 등으로 경황이 없어 연락을 못 드리긴 했었다. 사정을 듣고 보니 얼추 두 달 정도 지난 그 사이에 급성심근경색으로 수술을 마치고 엊그제 퇴원을 하셨다고 한다. 다음 주 찾아뵙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잠시 멍한 느낌에 정말 인생 별 것 없구나 싶다.
얼마 전 광주에서 철거 중이던 건물이 쓰러져 지나가던 버스를 덮쳐 사람들이 사망한 사고가 있었다. 그것도 참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내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멀쩡해 보이는 옆의 건물이 덮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떤 노래를 듣는데 백 년도 못 살 인간들이 천년을 살 것처럼 이라는 가사가 있었다. 이렇듯 죽음은 늘 내 주변을 맴돌지만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친구를 문병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자신이 먼저 죽을 수도 있는 것이 우리가 처한 상황이다.
“죽음이 두려울까,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울까?”
어느 시한부 판정을 받은 질문자가 법륜 스님에게 삶의 조언을 구하자 역으로 던진 스님의 질문이었다. 정답을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죽는다는 생각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내가 지금 50대이다. 평균 수명으로 치면 30년 정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데 별 문제가 없다. 그런데 어느 날 시한부 선고를 받고 3년 정도 살 거라는 말을 들었다고 치자. 그 후의 삶은 이전과 달리 많이 흔들릴지도 모르겠다.
왜 그럴까?
살아갈 기간의 길고 짧음 때문일까? 그래 봤자 둘 다 시한부인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내가 죽음에 대해 생각을 않고 지내지만 후자는 죽음에 대해 의식하게 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남들은 살 날이 많이 남았으니 인생을 좀 허비해도 여유가 있지만 질문자는 가뜩이나 살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울고 낙담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남은 기간 즐겁고 행복하게만 살아도 모자랄 판인데”
같은 상황이라도 관점을 어떻게 가지냐에 따라 내가 처한 상황이 달리 보인다. 그것은 다만 그것일 뿐이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는 것은 내 마음이 짓는 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일체유심소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