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유연해지고 늘 상황에 맞는 적절한 길을 찾게 됩니다. 이것을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는 ‘중도(中道)’라고 하고, 금강경에서는 ‘무유 정법(無有定法)’이라고 하고,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신문에 났더라 TV 뉴스에 나왔더라고 하면 그게 진실인 걸로 알았다. 비록 언론이 당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하더라도 보도 내용의 진실성에는 상당한 무게감을 실어주던 언론의 호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 1인 1 스마트폰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뉴스를 선택하고 다양한 전달 매체를 통해 외부의 정보를 수용한다. 문제는 너무 많은 정보들 속에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이제는 신문에 났더라고 하면 어느 신문이냐고 묻고 그 신문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내용 자체를 무시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오히려 대중매체 보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개인 유튜버들의 방송을 선호하며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는 도구로 삼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좀 위험하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틀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개인적으로 친한 스님이 한 분 계시다. 중국 운남 트레킹에서 만난 인연으로 그 후에도 가끔 연락을 하며 편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한 번은 정말 호기심에서 여쭈어 보았다.
* 나 : 스님, 평소 궁금한 게 있는데요, 항간에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그런가요?
* 스님 : 장 거사, 그거 말짱 헛소리야. 요즘 중들은 자기 머리 자기가 깎아. 전기 바리깡이 너무 좋아서 머리 깎는 거 일도 아니야. 그 말은 옛날 칼로 중머리 깎을 때 이야긴데 잘못하면 칼에 베어 피도 나고 그랬지. 그땐 정말 중이 제 머리 못 깎던 시절이었어.
같은 일도 시대가 달라지면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변화를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보거나 들었던 예전의 경험에 비추어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다. 이래서는 스님들이 전기 바리깡으로 수시로 제 머리 깎고 있는 현실인데도 여전히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소리를 하게 된다.
얼마 전 운남에 함께 갔던 벗을 만났을 때 스님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었다.
* 나 : 스님, 잘 지내시죠. 오늘 친구와 차를 마시다 전화 한 번 드렸습니다.
* 스님 : 장 거사, 나도 보고 싶으니 둘이서 한 번 내려오소.
* 나 : 네, 조만간 한 번 뵙겠습니다.
그래, 사람이 그리우면 만나러 가야 한다. 만남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니까. 주말을 보내고 하루 휴가를 냈다. 나는 지금 경주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