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로서 끌리는 두 사람이 있다. 시인 류시화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반면 내 취향은 아니다 싶은 작가도 있다. 소설가 김훈과 조정래다.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작가에 대한 호불호를 보면 나는 무게 있고 진중한 것을 못 견뎌하는 스타일인 것 같다. 그냥 좀 가벼우면서도 위트 있는 그런 글들이 끌린다. 어느 날 딸아이가 구입한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라는 책장을 넘기다 내가 그의 글에 끌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소설을 쓰는 사람은 소설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한다면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는 때에 나 좋을 대로 하는 것’을 그가 정의하는 자유인이라고 했다. 류시화나 무라카미 하루키는 취미나 여행도 즐기면서 딱히 자신을 시인이나 소설가라고 규정하지도 않고 쓰고 싶은 글을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넘나드는 자유로움이 좋아 보인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소설을 쓰면 됩니다. 우선 ‘딱히 예술가가 아니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안해집니다’
그렇게 자유롭게 사는 하루키지만 장편소설을 쓸 때면 하루에 200자 원고지 20매를 쓰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다고 한다. 장기적인 일을 할 때는 규칙성이 중요한데 글이 잘 풀릴 때면 기세를 몰아 많이 써버리고 막히면 그냥 쉬는 것으로 해서는 규칙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게 하루키의 생각이다. 좀 더 쓰고 싶어도 20매, 잘 안된다 싶어도 20 매라는 규칙을 지킨다는 그를 보며 전문 작가라는 직업은 여느 직장인과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알게 된다.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으로 살아가지만 원고지 20 매라는 규칙을 지켜가는 하루키나 영적 자유를 추구하며 인도 여행을 통해 시나 산문, 번역서가 툭툭 튀어나오는 류시화처럼 나 역시 그런 자유인으로서의 글쓰기를 추구하고 싶은가 보다.
묵직한 소설가 김훈이 화장장에서 한 되박 반 정도 되는 친구의 뼛가루를 보며 썼다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나오는 글이다.
세상에는 없는 게 3가지가 있는데~
1. 정답이 없다.
2. 비밀이 없다.
3. 공짜가 없다.
죽음에 대해 분명히 알고 있는 것 3가지가 있는데~
1. 사람은 분명히 죽는다.
2. 나 혼자서 죽는다.
3.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 3가지가 있다.
1. 언제 죽을지 모른다.
2.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3.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상황이 이러하니 좀 자유롭게 산들 어떠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