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선택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좋은 학교에 들어가고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직위에 오르려는 것도 달리 보면 남들보다 좀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함이다. 당연히 우리는 여러 선택의 대안들 중 최선을 선택하려 한다. 하지만 그 자리는 언제나 경쟁이 심하고 소수에게만 기회가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하지만 그 덕에 자원도 없고 좁은 땅에서 이 만큼이라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선에 이르지 못한 나머지 사람들은 어떡해야 하나? 다시 최선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다그치며 재 도전해야 할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땐 차선을 선택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최선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포기할 게 아니라 차선을 고르는 현명함을 발휘해야 한다. 그래도 차선이라도 고를 정도면 양호하다. 때로는 차선도 선택 못 할 경우가 생긴다. 길에서 강도를 만났을 때 돈은 주더라도 몸은 상하지 않는 게 현명하듯이 이럴 땐 최악은 피하는 것으로 가야 한다. 그걸 차악이라 하겠다. 최선 > 차선 > 차악, 최소한 최악은 피하는 수준으로 선택하는 게 필요하다.
즉문즉설에서 나온 이야기다. 새어머니와 살면서 자신에게 강압적인 아버지와 그만 인연을 끊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에 대해 법륜 스님은 질문자가 원하는 만큼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고 먹이고 입혀 대학까지 보내 주었다면 적어도 남보다는 나은 수준 아니겠냐고 되물었다. 이 사실까지는 인정하고 그에 대한 고마움이 있어야 미움 없이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리된다는 의미였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렇다고 참고 견디며 아버지에게 효도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못지않게 자신의 감정이나 선택도 존중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아야 괴로움 없이 관계를 잘 정리할 수 있다. 위의 경우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 마음이 아버지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 최선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차선의 아버지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님의 조언에는 나름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가진 것이 차선이나 차악인데 마음은 최선에만 머문다면 지금이 괴로울 뿐이라는 사실이다. 가진 것이 차선이라면 가진 것에 일단 긍정적인 수용이 필요하다. 또한 인생은 최선을 이루었다고 꼭 좋은 것도 아님은 여러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답은 없는 법이다. 요즘 들어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최선을 지향하며 살았지만 번번이 차선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 결과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더 나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학창 시절 이후 하고자 했던 바를 모두 이루었다고 해서 내 인생이 지금보다 훨씬 좋을 것 같지도 않아서다. 기독교인들은 이를 일컬어 “주여! 뜻대로 하소서”라고 할 것이다. 작은 내 머리로는 온 세상을 관장하는 이의 큰 그림을 알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그냥 지금껏 잘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잘 살거라 여기기로 한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날도 내가 지녀온 선택의 기준에서 크게 벗어날 것 같지 않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