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운을 바꾸는 시작점

by 장용범

어릴 적 집에는 가정대백과 사전이라는 두툼한 책 이 한 권 있었다. 그 안에는 정말 여러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나는 관상, 손금, 운세 등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나의 운명이 어떻게 풀릴지 궁금했고 나에게 맞는 직업으로는 어떤 분야가 적당한지 관심이 많았었다. 그 후도 내 별자리 운세 등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이 좀 시들해졌는데 그 계기가 마치 내가 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지 못하고 별자리나 띠별 운세라는 심리적 한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제는 일일운세 같은 것도 안 보는 편인데 하루의 시작을 미리 정해 두고 하는 느낌이 싫기 때문이다.


운명이란 정해져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금수저로 태어나고 어떤 이는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고 태어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선택이나 노력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냥 되는대로 살아도 결과는 그리 될 터인데 이건 불공평하다고 하늘에 소리친들 달라질 건 없다. ‘아모르파티’는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이다. 이미 주어진 것을 어쩌겠나 삶은 일단 주어진 운명을 수용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는 서양이나 동양이나 같은 관점인 것 같다.


최근 이혼을 했던 어떤 여인이 법륜 스님에게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자신은 이혼한 가정에서 자라났고 어려서부터 들었던 말이 부모복 없는 이는 남편복도, 자식복도 없다고 들었고 운세를 보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한 스님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운명이 정해져 있는데 두려울 게 무어냐. 애를 써도 운명대로 될 터이고 가만히 있어도 정해진 운명대로 될 터이니 두려울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만일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그것도 두려워할 일은 아닌 것이 잘 되든 못 되든 내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냐는 말씀이었다. 그런데 두려움의 근본 원인은 운명이 정해져 있냐 없냐가 아니라 욕심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이 할 역할은 모자라게 해 놓고 좋은 결과는 받고 싶으니 안 되면 어쩌나 두려워지는 것 아니겠냐고 하시는데 핵심을 지적한 말씀 같았다. 인생은 BCD라는 말이 있다. Birth(출생)과 Death(죽음) 사이의 Choice(선택)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책임은 스스로 지며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Choice(선택) 밖에 없는 것 같다. 아침에 더 잘까 일어날까, 산에 갈까 말까, 지금 공부할까 놀러 갈까 등등.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는 기꺼이 수용하는 것 밖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싶다.


고전평론가 고미숙 선생은 자신의 주어진 운명을 일단 긍정하는 것이 운을 바꾸는 시작이라고 한다. 이를 용신 또는 개운법이라 하는데 자신이 가진 운에서 막힌 것은 뚫고 넘치는 것은 덜어내고 겪어야 할 고생은 기꺼이 감내하는 것이 운을 바꾸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아주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냥 반복된 일상이고 습관이라 보인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나 본들 이 우주의 티끌만도 못한 존재가 아니던가. 하지만 개인으로 놓고 보면 저마다 소중한 생명을 부여받아 살고 있는 존재이다. 생명현상은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가역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위는 시간이 지날수록 풍화되어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어가지만 자갈이나 모래가 다시 바위가 되지는 않는다. 이를 비가역적 특성이라 한다. 하지만 생명현상은 영양분을 섭취하고 활동을 하면 에너지가 빠지지만 다시 수면을 취하고 음식을 먹으면 에너지가 생겨난다. 물론 큰 흐름에서는 죽음에 이르게 마련이니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는 자연법칙과는 좀 다른 면이 있는 것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삶을 유지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포도 안과 밖의 농도가 같아지면 평형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것을 죽음이라 한다. 살아있으려면 외부에서 들어오는 농도 짙은 물질들을 세포막 밖으로 부지런히 퍼 날라야 하듯이 가만히 있는 것은 생명을 가진 것이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붓다는 산다는 것을 고(苦)라고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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