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인생은 생각보다 공평하다

by 장용범

한 때 일을 함께 하다 형 동생으로 지내게 된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는 회계사와 함께 법인을 만들어 중소기업 컨설팅에 보험을 결합시킨 사업을 하고 있는데 모처럼 서울에 올 일이 있어 연락했다기에 저녁이나 함께 하자고 했다. 지난 만남이 3월이었으니 오랜만의 재회였다. 퇴근 후 약속 장소에 가니 다른 일행이 있었는데 공인중개사라는 여성분이었다. 현재 하고 있는 컨설팅 법인을 세무회계, 부동산에 보험대리점을 결합시켜 좀 더 발전적인 모델로 성장시키려는 것 같았다. 퇴사 후 한 때 어려움도 있었지만 이제껏 안정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좋아 보였다. 여러 대화가 오갔지만 그 여성분의 이력이 일반적이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인도 그것도 분쟁지역인 카쉬미르로 건너가 봉사활동을 했다는 것이나 비자 없이 미국 라스베가스로 가서 불법체류 경계선인 최대 90일까지 버티다 다시 캐나다로 건너가 90일, 캐나다에서 다시 뉴욕으로 넘어와 아르바이트하며 지낸 이력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큰 일들을 20대 초반에 했다 한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와 고졸 검정고시를 한 달만에 합격하고 대학엘 들어갔다 하니 청년기를 정말 가열차게 보낸 셈이다. 어려서부터 하고 싶은 것은 원 없이 해봤다는 30대의 그녀에게는 나이에 비해 강인한 인생 내공 같은 것이 느껴졌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스우파의 아이키 같은 이미지인데 그처럼 강렬하지도 않으면서 말을 아끼는 절제의 모습도 보인다.


사람들은 대부분 세 가지 범주의 일을 하며 지낸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인데 그녀는 이른 나이에 하고 싶은 일을 우선에 두고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본인은 사회의 통념을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비교적 이른 나이에 거의 경험한 것 같은데 지금의 마음은 어떠냐고 말이다. 그녀의 대답이다. “말씀대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그에 대한 아쉬움도 없구요. 그런데 아기를 낳고 보니 마음이 달라지더군요. 그 아이를 보며 사람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도 하며 지내야 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알게 되네요. 그런데 그 해야 할 일의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말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어떤 전제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없거나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냈을 때 생각해 볼 문제이다. 그녀처럼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하며 지내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 해야 할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최근 한 직원이 가을에 결혼한다며 청첩장을 들고 왔다. 입사 후 12년이 지났으니 이제 30대 중반의 나이로 어제 만난 그 여성분과 비슷한 또래였다. 대기업 정규직에 거의 연예인 같은 외모의 그 직원의 결혼을 않는 이유가 가정이라는 틀에 얽매이기 싫어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다. 이제 그 직원은 다소 늦은 결혼을 계기로 하고 싶은 일보다도 해야 할 일의 비중이 커지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이리 보면 인생의 일은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 적절히 배분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요즘의 나는 아주 좋은 컨디션이다. 이미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어느 정도 마친 상태이니 말이다. 물론 그 기간이 좀 길었고 내 모습은 어느덧 중년의 배불뚝이 아저씨로 변했다는 게 아쉽긴 하다. 하지만 이제부터 나에게는 해야 할 일의 비중은 좀 줄어들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늘어난다. 나는 이 상황이 기대된다. 그런 면에서 인생은 어느 정도 공평한 면도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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