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 차서(次序)를 지키다

by 장용범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 주지 않아도 /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 살다 보면 알게 돼 알면 웃음이 나지 / 우리 모두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지 / 잠시 왔다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 갈 세상 /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나훈아 ‘공(空’)의 가사


남편 : 잘 지내오?

아내 : 그럼요.


친구 같은 노부부는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코로나로 인한 요양원의 면회는 투명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서 서로를 보아야 했다. 말로만 듣던 광경을 곁에서 보니 참 기가 막힌다. 이게 어떻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사람 만나는 방식인가 싶어서다.


어머님의 생신을 맞아 부산에 오는 길에 처가인 창원에 들렀다. 언제 가더라도 반가이 맞아 주시던 장모님이 안 계신 처가는 어쩐지 낯설었다. 장인어른과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으나 남자들의 대화가 대개 그렇듯 이내 소재가 끊기고 만다. 마주 앉은 경상도 부자간의 대화를 그려보면 대강 그 분위기가 그려질 것이다. 장인어른을 모시고 장모님이 계신 요양원에 갔다. 두 분의 대화를 지켜보는 마음 한편이 먹먹하다. 팔십 노부부의 생이별은 남북 이산가족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장인어른의 마음이 어떠실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잠시 감정을 추슬렀다. ‘공(空)’의 노래 가사처럼 ‘백 년도 힘든 것을 천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는 게 인생인가 싶어서다.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 잘 산다는 게 뭔지 생각하게 되었다. 계절에도 봄과 여름처럼 에너지가 싹이 터 왕성하게 피어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가을에 들어 하나씩 버리다가 겨울이 되면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자연이 이처럼 순환의 과정을 밟듯 우리네 삶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런데도 어리석은 우리들은 봄과 여름만 영원하기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같다. ‘차서(次序)’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의미로는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 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게 돌아오는 기회’라고 정의된다. 인문학자 고미숙 선생은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삶을 살아가는 데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기에 차서(次序)를 지키며 살아가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은 그 시기에 맞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에 맞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창원에서 부산으로 넘어와 동생네와 함께 부모님을 모신 조촐한 식사 자리를 가졌다. 팔십을 넘기셨음에도 건강하신 두 분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모처럼 만난 가족들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는데 동생이 요즘 눈이 침침한 노안이 왔다며 형에게 엄살을 떤다. 그러면서 늙으면 왜 감각기관이 둔화되는지 최근 깨달은 게 있다며 노화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들려준다. 근육과 신경은 퇴화의 정도가 다른데 근육이 신경보다 더 빨리 퇴화한다. 그런데 이 상태가 지속되면 보고 듣는 신경은 앞서가는데 근육이 따르지 못하니 넘어지거나 부딪치는 경우가 생겨 몸을 크게 상하게 된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신경을 둔화시켜 근육에 맞추는 방식으로 몸이 진화해 온 것이라는 특이한 이론을 펼쳤다. 그러니 나이가 들면 몸의 변화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내 나이 오십 대 중반, 나의 차서(次序)는 무엇이어야 할지 생각해 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탐욕스럽게 더 많이 가지려고 에너지를 마구 쏟아붓는 것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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