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현재가 과거를 규정한다

by 장용범

신에게 날마다 기도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생활고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나아질 기미가 없자 마침내 자살을 결심하고는 신에게 원망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때 신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 너의 기도가 하도 간절해서 내가 좀 도와주려고 했었다. 그런데 하나 물어보자. 적어도 내 도움을 받고 싶으면 너도 뭔가를 좀 해야 할 것 아니냐. 하다 못해 주식을 사든 지, 복권이라도 긁든지 사업이라도 벌여야 도와줄 텐데 대체 내가 널 어떻게 도와줘야겠냐? 그런 주제에 나에게 원망을 늘어놓으니 듣다 못해 열 받아서 나왔다.” 유명 이코노미스트인 훙춘욱 박사는 운이란 것도 자신이 복권을 얼마나 긁느냐에 달린 것 같다며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홍춘욱 씨, 복권 당첨되었습니다’는 일은 없다고 했다.


이틀 전 퇴근길에 이상하게 기분이 좀 우울했다. 차를 아파트 주차장에 두고는 산책이나 좀 하자 싶어 주변을 돌다가 큰길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근처 카페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는데 경상도 중년 남자들의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지방서 올라온 두 동창생이 서울서 사업을 하는 재경회장을 만나는 자리인 듯 보였다. 경상도 특유의 억양 때문에 조용하긴 글렀고 그냥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은 이미 은퇴한 듯 보였는데 최근 부인도 은퇴해서 훈장을 받았다는 이야기, 뇌혈관 쪽에 코일을 삽입했다는 이야기, 젊을 적 구미에서 노사관계를 잘 풀어 노동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등 그 짧은 시간에 세 친구들의 인생역정을 다 들은 것 같다. 그런데 그중 한 사람이 공통적인 질문을 했는데 올해 자신의 노트에 기록할 만한 일로 뭐가 있었냐는 것이었다. 혼자 있던 나는 라디오 듣듯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가 마치 저 질문을 내가 받기라도 한 듯 지난 일 년을 끄적거려 보았다.


* 2020년 7월, 영업부진의 문책성 인사 조치로 기획역이라는 애매한 보직을 받아 현 부서에 왔다가 전임자의 은퇴 후 부서장으로 임명된 것

* 마음으로는 이미 은퇴를 했다 치고 남은 기간 동안 계약직으로 근무한다 여기니 현 상황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수용된 것. 이게 왜 좋으냐 하면 회사를 대하는 마음이 깔끔해졌다는 데 있다. 계약직에게 이 만한 근무조건도 없으니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 금감원 감사, 금융소비자보호법의 시행 후 준비 등 굵직한 이슈들도 많았지만 나름 선방했다고 본다. 조직규모는 처음보다 배로 커지고 내년에는 업무도 더 늘어나 부서의 위상이 올라간 면도 있다.


이 정도는 대략 회사의 업무적인 일들이고 나름 개인적인 시도들이 많았다. 작년 7월 이후 나와 회사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서 평소 끌렸던 일들을 찾아 좀 더 활동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 대학원은 이제 4학기를 마치고 한 학기만 남아 내년 가을에는 졸업할 예정이다. 게다가 원우회장직까지 수행하며 몇몇 행사까지 잘 마쳤다.

* 매일 글쓰기는 계속 이어가고 있고 900일을 넘겼다. 스스로에게 칭찬한다.

* 대학원의 책 쓰기 동아리를 결성해 매일 글쓰기를 실천하며 원우들과 좋은 교류의 장으로 만들었다.

* 코로나 이후 헬스장을 못 가게 되자 아침 산행으로 돌린 후 그래도 꾸준한 편이다. 100점 만점에 80점 수준.

* 러시아와 대륙에 대한 관심은 계속 유지하고 있어 크라스키노 포럼의 이사직을 맡았고 내년에는 올 연말 출범한 유라시아 평론에서도 활동을 할 것 같다.

* 50+ 센터에서 우연찮게 듣게 된 1인 창직 과정을 통해 좋은 인연들을 알게 되었고 은퇴 이후 일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지니게 되었다. 아마도 이 효과는 서서히 빛을 발할 것이다.

* 직장 밖의 인연들이 늘어났다. 역으로 직장 동료들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기대도 실망도 없는 쿨한 관계가 된 것 같다.

* 한국문인협회 정식 회원이 되었고 서대문 문협 편집국장으로 위촉되어 문집 발간에 관여했으며 나의 시 한 편이 안산 자락 시화전에 걸리기도 했다.

* 이외에도 집수리 기술학교인 녹색지대 협동조합, 강사 활동을 염두에 둔 기적의 협동조합 조합원이 되었고 라오 상하이에서 이루어지는 모임과 최근에는 1인 창직 과정에서 맺은 인연으로 메타버스 상의 전시 기획도 준비하고 있다.


돌아보면 2020년 7월 1일은 나에게 상당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당시에는 가슴이 많이 아렸지만 회사형 인간으로 살아온 지난날에 종지부를 찍고 개인의 정체성을 찾아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영화 스타워즈로 본다면 제복을 입은 제국군으로 있다가 혁명군으로 나온 느낌이다. 어떤 일이든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나의 과거가 규정된다. 지난 일 년 동안 내가 끌리는 일들을 찾아 거침없이 달려온 활동들을 보면서 2020년 7월 1일은 나에게 독립 기념일이란 생각도 든다. 내년은 은퇴를 앞둔 마지막 일 년이다. 개인적으로 끌리는 일들을 리스트업 해보니 가벼운 흥분도 된다. 그리고 업무와 조직 규모가 커져 부서 분할을 요청했는데 그 뜻이 수용되어 내년에는 업무부담도 좀 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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