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문인협회장의 이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퇴근 후 서두른다고 갔지만 행사는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코로나로 규모를 줄였다고는 하나 30명 정도는 모인 것 같았다. 각자의 공간에 칩거했던 시인, 수필가, 소설가들이 오랜만에 만나 환한 얼굴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맞은편에 앉은 분은 작사를 하신다고 했다. 자연스레 어떤 노래가 있으시냐고 여쭈니 대표적인 게 ‘안동역에서’와 ‘찬찬찬’이라고 하셨다. 알고 보니 가요계에선 꽤 알려진 작사가셨다. 가요의 작곡, 작사 이야기도 들려주시는데 대중이 짐작하기에는 작사가는 많고 작곡가가 적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작곡가는 넘쳐나고 작사가가 드물다고 한다. 옆에 앉은 여성분은 시인이셨는데 코로나로 국내에 들어와 있지만 주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사신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 분도 동남아 지역에서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 강좌와 한국문학을 현지어로 번역해서 올리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셨다. 불과 2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이런 분들과 교류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었다. 회장님은 새내기인 나를 다른 문인들에게 일일이 소개하며 띄워 주셨는데 많이 쑥스러웠다.
자카르타의 시인으로부터 받은 ‘인도네시아 문학’이라는 책을 넘기다 ‘사과 속의 씨는 셀 수 있으나, 씨 속의 사과는 셀 수 없다’는 구절에 잠시 멈춘다. 미국의 작가 Ken Kesey의 말인가 본데 나에겐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 내 눈앞에 사과가 있다. 빨간빛이 도는 향이 좋은 사과인데 반으로 쪼개니 이번에는 하얀 과육이 보이고 그 중심에 까만 씨가 박혀있다. 하나, 둘, 셋, 넷….. 사과 속의 씨는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다. 가감할 것도 없이 너무도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저 까만 사과씨가 품고 있는 가능성은 내가 가늠할 수가 없다. 꼭 긍정적인 가능성만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쪼아 물고 날아갈 수도 있고, 날씨가 너무 추워 싹도 못 틔우고 그대로 씨의 형태로 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씨앗은 어딘가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줄기와 가지를 뻗어 어엿한 사과나무로 성장하여 자신의 열매를 맺기도 한다. 그 시작은 작은 씨앗 하나이다. 열매 속 씨앗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씨앗은 열매를 벗어나 세상에 뿌려질 때 그 역할이 시작된다. 사람의 가능성도 그러하다. 가능성을 가능성으로만 간직한 채 한 생을 마감한다면 그건 씨앗이 씨앗으로 마감지은 것과 다름 아니다. 그러니 일단 가능성의 씨앗을 뿌려보자. 그것이 줄기로 뻗어 큰 나무로 성장할지 어느 날 날아온 새의 부리에 쪼여 씨앗의 운명이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시도는 해봐야 한다. 이것이 씨앗의 가능성이다.
또 하나는 인연 과보(因緣果報)의 씨앗이다. 오늘 내가 하는 행동, 내가 내리는 결정의 영향을 지금의 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선인낙과(善因樂果) 악인 고과(惡因苦果)’라는 말도 있듯이 아무래도 씨앗인 인(因)이 좋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것도 100%는 아니다. 연(緣)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에서의 인(因)과 연(緣)은 상응한다. 인(因)이 나의 영역이라면 연(緣)은 인간관계를 비롯한 환경의 영역이다. 이 둘이 잘 어우러지는 게 최상이겠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고 나는 다만 나라는 씨앗(因)을 어느 환경(緣)에서도 싹을 틔울 수 있도록 준비할 뿐이다. 그게 다이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일단 뿌려져야 어떤 결과든 나는 법이다. 지금 나는 직장생활을 마무리 짓는 시점에 남은 인생의 새로운 씨앗을 준비하여 그것을 뿌리는 중이다. 내가 뿌리는 이 씨앗 속에 얼마나 많은 사과가 숨어 있을지는 모르겠다. 나는 그저 준비하고 시도할 뿐이다. 그런데 그 과정이 재미있다. 지금의 나는 의미보다 재미를 좀 더 추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