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님은 운수 사업을 오랫동안 하셨다. 어릴 때는 그런 아버지가 대단해 보였는데 기름을 운송하는 유조차가 여러 대 있었고 그 숫자만큼 기사분들이 계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항상 거래처 접대로 늦은 귀가를 하시거나 출장이 많아 얼굴 뵙기가 어려웠다. 어릴 때이니 아버지의 사업 상태를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필요한 돈은 어머니가 주셨기에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모습에 사업이 그저 잘 되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나중에 은행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회계학을 배우고 현금 흐름을 익히면서 내 아버지는 당신의 사업을 어떻게 꾸리셨는지 궁금해서 여쭈어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알게 된 건 당시 아버지의 사업이 과다한 부채와 아슬아슬한 현금흐름 속에서 경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단 유조차량이 워낙 고가이다 보니 대부분이 중고 차량을 사채나 대출로 구입했었고, 그 차량이 운송할 수 있는 일거리를 거래처를 통해 확보해 일하고 대금을 받는 식이었다.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 대금이란 게 대부분 몇 개월 후에나 돈을 주겠다는 약속어음이라는 게 문제였다. 기사들 월급이나 차량 유지비는 대부분 현금으로 나가야 하니 아버지는 그 어음을 사채시장에서 할인해 자금화 하거나 당신의 당좌계정을 통해 어음을 발행하면서 지급할 어음의 만기일을 조정하는 식으로 부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 드셨던 것이다.
그게 가능했던 건 두 분이 석유 소매상을 하며 어렵게 집을 마련했는데 그 집을 은행에 잡혀 당좌계정을 열고 현금흐름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말은 만일 부도가 나면 할머니를 포함한 온 가족이 거리에 나 앉는 상황이었으니 얼마나 긴장된 사업이었을까 싶다. 그래도 당시는 우리나라가 10%대의 높은 경제성장을 구가할 때라 일거리는 넘쳐나고 현금흐름도 좋아 대출을 받고 어음할인을 하더라도 경영이 가능했던 것 같다. IMF 이전 대기업의 부채비율이 보통 600% 대가 넘었던 걸 보면 당시 기업들의 경영방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피크가 88 서울 올림픽이었나 보다. 그 후 90년 대에 접어들면서 점점 경제성장률도 둔화되고 시장에는 경쟁사들이 늘어나게 되니 현금흐름도 악화되기 시작했다.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아버지는 위암이 걸리셨고 그 계기로 사업의 출구전략을 찾게 되셨다. 무엇보다 막내까지 학업을 마칠 무렵이었고 장남은 취업을 했던 시점이었다. 그렇게 운수사업의 기본인 차량을 할부조건으로 기사들에게 넘기면서 조금씩 사업에서 물러나셨고 마지막엔 오랫동안 은행에 담보했던 집도 되찾아 올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은 한 마디로 자기 자본은 부족하지만 이 나라의 고도 성장기에 빠른 현금 흐름을 활용한 차입경영이었던 셈이다. 이런 경영의 리스크는 어느 한 곳에 현금 흐름이 막히면 줄줄이 연쇄부도로 이어질 수 있으니 나의 운명이 남의 손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 아닌 사업이다. 은행에서 대출업무를 했던 내 경험으로는 담보 없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기업인 셈이다. 아버지 사업의 그런 사정을 알고 나니 할머니까지 모시고 어린 자식들을 키워내던 가장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싶다. 아버지는 그때 암이 걸린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하시는데 그만 사업을 멈추라는 신호였고, 그것을 계기로 사업을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자식들 잘 키워냈고 두 분이 건강하고 평안한 노후를 얻었으니 더는 바랄 게 없다는 당신은 “은행빚은 정말 무서운 거야. 인정사정없거든”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그 영향인지 나는 금융업종에서 일하고 있지만 대출이나 빚에 대한 거부감이 꽤 강한 편이다. 할부로 자동차나 휴대폰을 구매하는 것도 불편하고, 저 돈을 평생 갚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대출받아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이 선뜻 이해 안 될 때가 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빚진 사람은 돈을 빌려준 사람에게 위축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싫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