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잘 말해 주는 것은 나의 주의나 주장이 아니라 내가 은연중에 행하는 행동, 혹은 혼자 있을 때 하는 행위이다. / 류시화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내가 업무상 만나야 했던 사람 가운데 이상하게도 만나고 나면 찝찝한 그런 사람이 있었다. 이유가 뭔지 나 스스로도 모르니 참 이상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최근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는 상대방에게 부채감을 안겨 주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교묘한데 마치 자신은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판관이 된 것처럼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여 상대를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사람이었다. ‘너는 그게 문제야.’ ‘너는 배려가 없어.’ 등등 끊임없이 자신의 심리적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누군가보다 높은 직위에 있다면 군림을 하는 전제군주 같은 사람이 될 것이다.
이들은 상대가 자신보다 직위가 높거나 만만치 않다 여겨지면 더 높은 사람을 거론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지난달 성과에 영업담당 임원이 화를 많이 내셨습니다.’처럼 듣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말을 듣고 나중에 직접 임원에게 전화드리면 그 정도의 심각성은 아닌 경우가 많았다. 호가호위 즉 여우가 호랑이 가죽을 쓰고 있는 셈이다. 그를 상대하고 있으면 마치 내가 그의 기준에 맞춰 살아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러다 어떤 결과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면 마치 주인이 강아지에게 간식을 주듯이 ‘그 봐, 내가 하라는 대로 하니까 되잖아.’라는 식의 칭찬을 한다. 이런 유형은 내 인생에서 걸러내야 하는 사람이다. 한 번 말려 들어가면 끊임없이 그의 기준에 맞추는 노예 같은 삶을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가정 내에서도 일어나는데 자신의 자녀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부모들이 있다. 이런 부모를 둔 자녀들은 건강한 정신으로 자라나기가 어렵다. 적어도 자녀가 부모의 노예는 아니지 않은가. 부모의 역할은 자녀의 넉넉하고 편안한 심리적 쉼터가 되어야 하는데 이런 유형의 부모는 자녀의 독립성을 훼손하여 결국 관계는 갈수록 틀어지고 만다. 만일 부모가 이런 유형이라면 성인이 되었을 때 속히 그 부모 밑을 벗어나는 게 최선이다. 기준을 정하고 부채감을 주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건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주위에는 의외로 성인이 되어 부모와 관계가 틀어진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그 이면에는 이런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런 부모 밑의 아이는 부모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심리는 억압되면 언젠가는 터지는 속성이 있으니까.
내친김에 내가 피해야 할 사람이 또 어떤 유형이 있는지 더 살펴보니 이번에는 ‘당연히’라는 말을 자주 언급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던 그는 ‘당연한 거 아냐’라는 말을 은연중에 자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리 보면 반드시 피해야 할 인물인가 보다. “당연한 거 아냐.”, “너는 나에게 이 정도는 당연히 해 줘야지.” 등의 말들을 한다. 경험과 살아온 인생이 다른데 당연한 게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놓고 상대에게 맞추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멀리 할수록 좋은 법이다.
마지막으로는 가타부타 말없이 침묵하는 사람이라는데 심리적 불만을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아두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 정도는 말 안 해도 알아서 해줘야지 라는 태도의 사람이다. 그러다 한꺼번에 터져버려 무방비의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유형이 살아가면서 가급적 피해야 할 인간들이라고 한다. 각자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자신의 먹잇감으로 삼아 뜻대로 조종하려 드는 사람들이 꽤 있는 것 같다. 이럴 때 상대를 정확히 꿰뚫는 나의 식견이 중요해 보인다. 내가 그를 바꿀 수는 없으니 피하는 게 상책이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심리적 거리라도 두어야 내가 안전하다. 내가 누군가의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고 있지는 않은지도 스스로 살펴야겠지만 혹시 나도 은연중에 그런 태도로 상대를 대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