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3. 바삐 사는 것만이 충실한 삶은 아니다

by 장용범

점심 때 산책을 하다가 문득 이런 깨우침이 있었다. ‘하루를 충실히 산다는 것이 바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입버릇 처럼 바쁘다는 말을 자랑삼아 이야기 한다. 바쁘지 않으면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여기에는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농경을 해야 했던 한국인 특유의 부지런함도 있을 것이다. 바쁘다고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쉴새없이 울리는 전화벨 속에 수화기를 목과 어깨에 끼고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자판을 두들기고 있는 모습이다.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고 멋있어도 보인다. 하지만 그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과연 충실한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까? 글쎄, 그냥 모든 에너지가 썰물처럼 빠져나가 공허함이 느껴지진 않을까 한다. 기 빨린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장자의 소요유에는 붕이라는 새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는 글이 있다.


북명(北冥)에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이름이 곤(鯤)이다. 곤의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이 붕(鵬)이다. 붕의 등짝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길이 없다. 힘차게 비상하면 그 날개가 하늘에 구름을 드리운 듯 보인다.


장자를 처음 읽으려고 했을 때가 대학 시절이었나 보다. 하지만 책을 펴자 이런 말 같지 않은 이야기가 나오기에 다시 덮어 버렸다. 뜬금없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어서다. 그런데 요즘 그 붕이라는 새를 떠올리며 장자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뻥을 쳤을까 궁금해진다. 그 책에는 붕이라는 새를 바라보는 매미나 작은 비둘기의 비웃음도 있다.


우리는 후다닥, 있는 힘껏 날아올라서,

느릅나무나 다목나무 가지 위에 머무른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 하고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경우(境遇)도 있다.

그런데 붕(鵬)은 무엇 때문에 굳이 9만리(萬里)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남녘으로 날아가는 것일까?


아무튼 장자의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처음부터 거부감이 든 걸 보면 나 역시 매미나 작은 비둘기 수준이지 싶다.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바쁘게 산다는 것은 아니라는 번득임에 스스로 ‘아하!’라는 감탄사가 든 이유가 있다. 요즘 내가 하는 업무와 무관하지 않아서다. 다른 부서에서 진행하는 일들을 잘했나 못했나 따져보고 승인하는 일이어서 처리에 시간을 다투지 는 않는다. 애매한 사안은 법률자문을 거쳐야 하고 때로는 문구 하나를 두고 좌고우면하기도 한다. 현장 영업처럼 역동적이지는 않아 어느 때는 이게 지금 일을 하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회사에는 그런 일이 필요하다. 작년에 금소법 시행 후 금융회사는 새로운 법률 리스크에 직면하게 되었고 대표이사도 틈만나면 강조 하듯이 지금의 업무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업무이다. 다만 이전에 비해 바쁘지 않다는 이유로 입에 단내 나도록 움직이는 영업부서나 현장에 대해 마음 한 켠에 미안함이 있었나 보다.


일을 열심히 하고 바쁘다는 것이 꼭 일을 잘 한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일을 잘 한다는 것은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될 일을 구분해서 해야 할 일은 하고, 해서 안 될 일은 하지 않는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일의 구분을 잘못했거나,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해선 안 될 일을 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리고 일은 적당한 게 좋다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승진하려 하고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이유가 뭔가? 남에게 인정도 받으면서 좀 더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간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승진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분단위로 헉헉대며 바쁘게 살아야 한다면 참으로 딱한 일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는 풍경은 모든 게 천천히 지나가는 것 같다. 반면 KTX를 타면 창밖 풍경이 휙휙 빠르게 지나간다. 그렇다고 KTX가 비행기 보다 빠른 것은 아니다. 매미나 비둘기 처럼 바삐 움직여야 하는 일도 있지만 붕이라는 새처럼 멀리 보고 움직여야 할 일도 있다. 하루를 충실히 지냈다는 것은 오늘 하루 나를 둘러싼 모든 인연들과 조화로웠다는 것이고 잠자리에 들면 꿈도 꾸지 않을 정도로 편안하게 잔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바쁘지는 않았지만 충실하게 보낸 하루였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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