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심리적 디폴트 값은 불안하고 부정적인 것에 쏠리도록 진화되었다고 한다. 풀숲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귀여운 토끼가 떠오르기보다는 징그러운 뱀이 아닐까 머리끝이 쭈뼛선다. 지금이 편안하고 아무런 걱정이 없으면 이 편안함이 언제 깨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것이 인간 심리이다. 그런데 이것은 유리한 인간의 진화 방향이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의 주인공이 백에 아흔아홉 번이 토끼라고 해도 마지막 한 번이 독사였다면 방심하던 그 원시인은 죽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불안은 근원적인 것이라 하겠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아스팔트 위에서 뱀을 만날 일은 없겠지만 수 만 년간 진화되어 온 불안이라는 디폴트 값은 여전히 유효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알리바바 창업자 마윈은 ‘방어적 비관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려운 말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하라는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긍정적인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세상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었던 이들은 긍정과 부정의 전망을 3:1 정도로 비중을 두어 리스크 관리를 해왔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선천성 사지절단증은 말 그대로 팔다리가 없는 상태에서 태어난 이들을 일컫는다. 일본의 오체불만족의 자 오도다케 히로다타, 최근에는 호주의 닉 부이치치 그리고 한국에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구원 선교사이다. 멀쩡한 손발이 다 있어도 살기 어렵다는 세상인데 그들의 주어진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그런데 위의 경우 같은 사지절단증의 상황이어도 동서양의 차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동양은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보지만 서양은 수용의 대상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극복의 대상인 장애는 정싱인들과 같은 무언가를 하기 위해 장애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자신의 사지절단증을 수용의 대상으로 삼았던 닉 부이치치의 경우는 사지가 없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정상인들은 할 수 없는 무척 다양한 퍼포먼스를 선보여 준다. 나의 부족함을 채워 누군가와 같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금 모습을 수용하고는 팔다리가 없는 상태에서도 수영을 즐기고 악기도 연주하는 등 정상인이 못하는 자신만의 능력을 키워갔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들은 무척 다양하다. 금수저로 태어난 누군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스포츠 카를 몰고 다니지만, 같은 나이의 누군가는 알바를 서너 개씩 뛰어도 여전히 생활이 어려운 이들도 있다. 하지만 불교의 가르침에 의하면 어떤 인생이든 괴롭기는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럴 때는 딱 이 한마디면 좋겠다. “Yes, But~”. 나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없이 주어진 삶에 대해서는 “Yes!”. 그러나 그 상태로 머물지는 않겠다는 의지는 “But~”. “Yes, But~”의 대척점에 있는 말로는 “NO!, So~” 일 것 같다. 어쩐지 둘의 뉘앙스는 약간 다른데 비록 지향하는 바는 같을지라도 전자의 경우가 좀 부드럽고 과정을 즐기며 가는 방식이라면, 후자의 경우엔 이를 악물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마침내 결과를 달성할 것 같다. 어쩐지 나는 ‘Yes, But~’에 더 끌린다. 종착점이 같은 인간의 생애는 대부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