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1. 천년을 살 것처럼

by 장용범

최근 요양원에 계신 장모님이 수술을 받으셨다. 연세가 고령이라 회복이 염려되었는데 다행히도 경과가 좋으신 것 같다. 아내의 마음고생이 컸는데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것 같아 반성의 마음이 크다. 일본의 한 의사가 쓴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아내가 읽고 있어 아무래도 이번 장모님의 일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병원은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기도 하지만 죽음을 처리하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은 대부분의 죽음이 병원에서 일어난다. 익숙한 집에서 눈을 감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일단 생의 마지막은 병원으로 옮겨져 낯선 병실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일반적이다. 어릴 땐 가끔 그 집의 초상을 알리는 청사초롱이 걸린 것을 볼 일이 있었지만 요즘 그런 광경은 찾아보기 어렵다. 상황이 이러하니 죽음은 병원 의료진이나 대하는 것이지 일반인들에게는 낯선 대상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인간은 죽음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데 가까운 사람의 죽음조차 볼 기회가 없으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만 더해간다.


수년 전 나는 사전연명치료의향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당시의 마음은 만일 내가 죽음을 맞이하는데 의식이 없는 상황이라면 기관지를 절개해 호흡관을 삽입한다거나 삼키지도 못할 죽 같은 음식을 위에다 직접 공급하는 등의 조치는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니 순순히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내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병원에서는 아내나 딸들에게 물을 것이다. 더 이상 호전되는 치료는 못하지만 저렇게 의식불명 상태로 생명은 좀 더 연장시킬 수 있다고 말이다. 대신 돈은 좀 든다고 하겠지. 사전연명치료의향서는 그런 상황에서 치료 중단을 결정함에 가족들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요즘 주변을 보면 사람이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거의 똑같은 판박이 같다. 50대 중반에 은퇴를 한다. 아직 건강하니 뭔가 돈벌이를 더 찾아본다. 60대가 되면 이제 그런 일도 서서히 끊기고 남아도는 시간 속에 무료한 일상들을 보낸다. 병 없이 지내고 자식들이 사고나 안 치면 다행이다. 가뜩이나 부족한 노후자금이 병원비나 자식들의 뒤치다꺼리에 들어가면 나중에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서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70대가 되면 꼭 어딘가 몸에 안 좋은 곳이 생긴다. 그나마 한국은 건강보험이 잘 되어있어 이때부터 노인들의 병원 순례가 시작된다. 이 병원, 저 병원 괜찮게 봐준다는 병원을 찾아다니고 몸에 좋다는 건강식품이나 TV 광고하는 건강기기들을 사 모은다. 그러다 80대가 되면 정말 낙상을 조심해야 하는데 이때 뼈라도 다치게 되면 남은 삶의 질이 형편없이 되고 만다. 이러다 치매라도 찾아오면 자식들은 각자의 생활이 있으니 형편에 맞는 요양원을 알아보게 된다. 돈에 좀 여유가 있으면 좋은 요양원에 보내고 아니면 낡은 시설에 무뚝뚝한 도우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가족들과 떨어져 노인 집단 수용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그리 지내다 죽음을 맞이할 즈음이면 엠뷸런스에 실려 가까운 병원으로 가고 그곳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는다. 오랫동안 인공호흡기를 안 달고 이렇게 가는 것만 해도 그나마 깔끔한 인생이다.


백 년도 못 사는 인생이 천년을 살 것처럼 한다더니 50대 이후의 삶은 인생의 기승전결 중 마지막 결에 가까워지는 시기이다. 그럼에도 60대 중반까지는 책임감은 줄고 시간과 건강에 여유가 생기는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개인의 삶에 이런 황금기는 앞으로 더 이상 없을 것이니 허투루 보낼 일이 아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