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다는 게 느껴지는 것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호기심은 재미를 불러오는 시작이기도 해서 나이가 들게 되면 별 재미있는 일도 없어지는 것 같다. 아내에게 이런 얘기를 했더니 늙어서 호기심 많은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다고 했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다. 이마에 주름살 깊이 패인 노인이 여기저기에 호기심을 품고 눈을 반짝이며 “왜?’라고 묻고 다닌다면 좀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것이다. 지구 상의 많은 동물들이 있지만 호모 사피엔스가 지배 종이 된 이유는 자신과 외부 세계에 강한 호기심을 품었고 그것을 탐구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문우답(愚問愚答) 현문현답(賢問賢答)이다. 영화 ‘올드보이’의 한 대사이다.
“당신의 진짜 실수는 대답을 못 찾은 게 아냐. 자꾸 틀린 질문만 하니까 맞는 대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왜 이우진(유지태)은 오대수(최민식)를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란 말야.”
세상에 대한 질문을 멈췄을 때 우리는 정체된다. 그리고 그 정체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주어진 조건에 순종하게 된다. 만일 지금의 내가 편안한 우리 속의 돼지라고 생각해 보자.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사료가 주어지며 한 번씩 목욕도 시켜준다. 내가 할 일이라곤 먹고 자고 뒹굴거리는 일 밖에는 없다. 너무도 편안하고 좋은 생활이다. 그런데 현명한 돼지라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다. ‘저 사람은 왜 매일 나에게 사료를 주고 목욕을 시키며 내 집을 청소까지 해줄까?’ 돼지가 안다고 뭐가 달라질까. 차라리 언제 도축될지 모르는 게 약이라 할 수도 있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돼지는 인간의 가축 신세에 머무는 것이다.
사람도 그러하다. 주어진 환경에서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않게 되면 누군가가 만들어 둔 시스템 안에서 하나의 부속품으로 지내다가 그 수명이 다하면 용도 폐기되는 신세가 된다. 나이가 들면 왜 호기심이 덜해지고 질문을 멈추게 될까? 이게 좀 궁금하다. 이미 웬만한 건 다 안다는 기시감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익숙한 게 좋지 변화라는 게 성가시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니 좀 재미는 없더라도 이대로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생명현상은 끊임없는 변화가 기본이고 그 변화에 적응하는 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피곤함 또는 괴로움(苦)이라고 해도 좋다.
아들 : 엄마, 이모가 왜 병원에 갔어요?
엄마 : 응, 집에 오다 얼음에 미끄러져서 다치셨대.
아들 : 다쳤는데 어떻게 병원에 갔어요?
엄마 : 이모부가 차로 태워 가셨대.
아들 : 그런데 엄마, 얼음은 왜 미끄러워요?
엄마 : 야! 얼음은 원래 미끄러운 거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얼른 손 씻고 와서 밥이나 먹어.
지금의 시대는 호기심을 충족시킬만한 다양한 도구들이 늘려있다. 심지어 지나가다 어떤 꽃의 이름이 궁금하다면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올리기만 해도 이름을 알려주는 세상이다. 우리의 문제는 그리 알고 싶지 않다는 데 있다. 누가 호기심을 지니는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는 다르게 생각했던 소수의 사람들이 불쏘시개를 만든 덕분에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상하다. 사과가 왜 아래로 떨어지지?
지구가 둥글다면 출발한 곳으로 돌아오겠지.
공작새 수컷의 꼬리는 왜 있는 걸까?
저 번개의 정체가 뭘까?
사람이 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깊은 바닷속이 궁금한데 들어갈 방법이 없을까?
하나가 살기 위해서 왜 하나는 죽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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