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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5. 새벽의 풀벌레 소리

by 장용범

새벽에 눈을 떴는데 어제까지 들리지 않던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은 기록적인 폭우로 경황이 없지만 계절은 어느덧 가을로 넘어가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계절의 나고 드는 것은 스치는 바람에서 하늘의 빛깔에서 달라진 공기에서 알게 된다. 이내 사라질 자연의 미미한 존재건만 온 세상을 분탕질 치고 추하게 사라지는 인간들을 자연은 그렇게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어제 점심에는 직원들에 대한 조촐한 격려의 자리를 마련했다. 금감원의 평가에 대비한 500개가 넘는 파일 자료를 준비하느라 지난 2주간 정말 고생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이런 자리는 주로 저녁에 이루어지고 으쌰 으쌰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시대가 달라지니 점심때 간단히 식사만 하게 된 것이다. 마음 한 구석엔 저녁 회식의 미련이 없지 않지만 직원들이 썩 반기지 않아 강요는 않게 된다. 더구나 요즘은 술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현장의 불미스러운 일은 직원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아 저녁 회식은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자리가 되고 말았다. 반면 좋은 점도 있다. 직장에서의 일이나 인간관계에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있어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리고 있어서다.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새로운 배움을 시작하기도 한다. 하루 중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지만, 직장에 대한 정의를 사람들이 각자의 돈벌이를 위해 모인 한시적인 장소로 정했더니 일이나 관계가 더 명료해졌다. 이렇듯 조직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나 보다.


인생의 절반을 한 회사에 근무하다 보니 이곳이 나와 영원히 할 듯한 착각을 한 적도 있었다. 머리로는 그렇지 않음을 알지만 몸과 마음은 달랐던 것이다. 익숙하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다른 것을 생각하기가 귀찮아진다. 인지과학 용어로는 스키마(Schema)라고 하는데 그냥 익숙한 그 무엇이다. 회사는 나에게 스키마적 요소를 준 고마운 곳이다. 은퇴가 두려운 이유는 오랜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 처음부터 익숙한 것이 어디 있던가? 처음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도 여름, 겨울 방학 없이 어떻게 1년 동안 일만 하나 싶어 갑갑했던 기억이 있다. 지나고 보니 회사도 나에겐 시절 인연이었던 셈이다. 다만 좀 오래 머물렀던 곳이었다. 올해의 가을 풀벌레 소리를 듣고 잠시 감상에 젖는다. 사람들은 80년 만의 폭우라고 난리 치고, 서로 죽이는 전쟁을 하고, 인플레이션으로 못살겠다고 아우성쳐도 자연이라는 거인은 그의 길을 뚜벅이처럼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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