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만남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겐 한 때의 시절 인연이었지만 퇴사 후 9년이 지나도록 이어지는 형님 같은 본부장님이 계시다. 이제는 한동안 연락이 없으면 서로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이가 되었는데 지난 금요일은 본부장님과 오랜만에 저녁 자리를 하게 되었다. 재직 시 같은 본부에서 일했던 동갑내기 부장과 함께 한 자리였다. 두 분은 이미 은퇴를 했지만 나도 머지않아 은퇴라 서로의 처지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소주가 좀 돌고 나자 공통된 관심사에 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 잘난 자식은 나라에 바치고 부모는 못난 자식만 껴안고 산다.
- 미국 사신다는 본부장님의 형님 이야기다. 조카가 둘인데 능력들이 뛰어나 미국 내에서도 상당히 성공한 것 같았다. 그에 걸맞게 며느리들은 홍콩과 인도네시아계 화교로 그 나라의 준재벌급 정도의 처가라고 했다. 하지만 거기에 부모의 자리는 없었다며 자식을 성공시킨 부모의 외로움을 토로했다고 한다. 이제 본부장님의 형님은 한국에서도 이방인, 미국에서도 이방인의 신세가 되어 있더라는 말씀이었다. 국내서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만 키울 때 자식이지 크고 나면 남이란 말이 빈 말이 아니다. 장성한 자녀에 대해서는 부모가 집착을 끊어야 건전한 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것 같다.
* 부모 가까이 사는 자식이 효자다.
- 나의 경우 아무래도 부모님 곁에 사는 동생이 부모님을 더 돌보게 마련이니 형인 내가 동생에게 잘하라는 말씀이 있었다. 본부장님도 한 동안 어머님과 함께 생활하다 최근 요양병원으로 모셨는데 다른 형제들은 어머님 모시는 일을 자신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아 서운했다고 하셨다. 아이들까지 독립하니 이제는 부부가 각자 방 2개에 화장실 하나씩 차지하게 되는 호사에 결혼 30년 만에 둘 만의 생활을 갖게 되었다고 하신다. 가족이란 한동안 북적이다 결국 그리되는 것 같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사모님에게 의존하신다기에 요리 좀 배우시라고 했더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신다.
* 아무리 많아도 부족한 게 돈이다. 은퇴 후에는 가진 돈에 맞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 본부장님은 은퇴 후 재취업을 않으셨다. 재력이 되니까 그러셨겠지만 돈은 그럼에도 부족하게 여겨지더란다. 어떻게든 살아지게 마련이니 은퇴 후엔 돈을 더 벌어 내 욕망을 채우는 것보다 가진 돈에 맞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 친구들과 어울려도 N분의 1일 편하지 누가 일방적으로 내겠다고 하면 불쾌하다.
- 의외였다. 은퇴하면 돈 잘 내는 사람이 최고라는 말을 들어서다. 그런데 달리 보면 심리적으로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부담하면 내 마음은 빚진 상태로 남아 종속되는 것 같은 불쾌함이 남을 수 있음을 알았다. 이건 내 어머님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모임에서 누가 일방적으로 부담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남에게 함부로 베푸는 것도 결례가 된다. 모임도 이렇게 흘러가니 갈수록 돈 드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말씀이다.
* 의도치 않은 몸의 이상으로 병원 찾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 본부장님은 최근 몸의 이상으로 다섯 개 정도의 진료를 정기적으로 받는다고 하셨다. 젊었을 때 열심히 돈을 모아 늙어서 의사에게 갖다 준다는 말이 떠올랐다. 아무리 카리스마 있고 화려하게 젊은 시절을 보냈더라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다. 건강에 자신이 없으면 삶의 질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비행기 타기가 부담스러우니 외국 여행도 힘들 것이다.
본부장님을 뵈며 나의 은퇴 후 3단계 계획이 적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단계(은퇴 후~65세): 은퇴 후 최고의 전성기
가정과 사회의 책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고 정신과 육체 건강도 받쳐주는 시기. 자기 자신을 위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 비록 돈을 더 번다는 건 어려울 수 있지만 대신 시간이라는 큰 자원을 가지게 된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는 게 좋은 시기이다. 남은 인생에서 그럴 기회가 점점 없어질 테니까.
2단계(65~75세): 은퇴 후 성숙기
건강이 조금씩 나빠질 수 있는 시기. 활동 반경도 국내 정도나 부담 없지 낯선 외국은 꺼려짐.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보다는 1단계에서 했던 일이나 만남을 지속할 수 있으면 좋은 시기이다.
3단계(75세 이후): 은퇴 후 쇠퇴기
노인성 치매, 만성질환 등으로 고통받을 수도 있는 시기이다. 활동반경은 동네 정도가 부담 없지만 이것도 80세 이후엔 집이 가장 안전한 활동 반경이 된다. 이 시기에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으려나? 84세의 내 아버님을 뵈면 하루 종일 TV만 보시는 것 같았다.
나보다 9년 먼저 은퇴 후 삶을 살고 계신 형님 같은 본부장님을 뵈면 내가 참고하며 배우는 게 많다. 인간은 생명을 시간으로 바꾸어 살아간다고 한다. 우리는 돈 귀한 줄은 알지만 시간의 소중함을 곧잘 놓치는 경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