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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1. 조용히 그만두기

by 장용범

9월의 찬바람이 분다. 남쪽에선 '힌남노'라는 강력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 한반도의 태풍은 꼭 추석 즈음에 닥치는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패턴이고 루틴인가 보다. 자연이 일정한 패턴에 따라 움직이듯 삶에도 질서와 루틴이 필요하다. 동료들은 나에게 월급을 뜻하는 은어인 도토리가 얼마 안 남았음을 일깨워 준다. 지나치며 묻는 인사가 은퇴를 앞둔 마음이 어떠냐고도 한다. 그런데 사실 별 생각이 없다. 예정된 12월 31일까지 출근과 퇴근의 루틴을 반복하다 조용히 사라지면 되는 거지 별다른 게 있나 싶다.


요즘 ‘조용히 그만두기(Quiet Quitting)’라는 틱톡 영상이 화제가 되나 보다. 지인이 관련 기사를 전해 주기에 읽어보니 ‘조용히 그만두기’란 실제로 직장을 그만두는 게 아니라 소극적으로 일하기 정도로 받아들여졌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직장인들은 자신의 노동가치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음을 실감했다. 회사가 사람을 줄여도 생산성은 늘어나고, 굳이 출근을 안 해도 일하는데 지장이 없는 현실을 접하며 일에 대해 열정을 쏟기보다는 그냥 주어진 시간을 때우고 월급 받는 캐시플로 정도로 여기는 마음이 생겼나 보다. 노동자로서 그렇게 열정을 쏟아본들 조직 내 개인의 한계가 명확히 보였기 때문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워라벨'과 조금 다른 점은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아예 일에 대해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일종의 좀비 같은 직장인이 된 것인데 일에 대한 열정이나 몸 담은 회사에 대한 애정 같은 것이 사라진 상태이다.


기사 내용을 보니 2년 전 내가 지녔던 생각과 비슷했다. 당시 은퇴까지 남은 기간은 2년, 한 때는 영업조직을 3,500명까지 운영하며 매월 실적을 경신했지만 과거의 성과는 묻혀버렸고, 코로나 이후 힘들어진 영업 환경에 조용히 후선으로 물러나야 했다. 조직에 대한 서운함도 있어 그 해 좋았던 명예퇴직 조건에 그만 둘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 먹은 계기가 지금의 ‘조용히 그만두기’와 같은 이성적 판단 때문이다. ‘지금 당장,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치자. 아직은 일을 좀 더 해야 하니 재취업을 위해 직장을 물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 후보군 중에 지금의 직장도 포함시켜 두자. 나는 이들 중 가장 좋은 조건의 회사를 선택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직장이다.’라는 생각이었다.


이후 내가 회사를 대하는 관점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는데 회사란 나의 노동과 시간을 제공하는 대가로 돈을 받는 곳으로 단순화했고 더 이상 감정의 찌꺼기를 남겨두지 않았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과거의 직원들은 한 때의 시절 인연들로 대하고 관계에 대한 어떠한 미련도 접어 버렸다. 이런다고 일이 안 되었을까? 아니다. 오히려 일은 더 잘 되었다. 오직 나의 일만 챙기는 부서 이기주의에 편승한 결과이다. 회사 전체를 생각하는 것은 경영진의 일로 여기고 다른 부서가 힘들지언정 나는 오직 맡겨진 일만 했더니 업무는 부각되었고 인원 증원과 함께 평가는 1등을 달성했다. 이건 참 아이러니하다. 스트레스는 덜 받고 성과는 좋게 하는 방법, 그것은 오히려 쓸데없는 힘을 빼는 데 답이 있었다. 회사의 일은 돈벌이 수단일 뿐이라고 일과 나를 분리하는 작업을 거치니 오히려 뿌옇던 안개가 걷히고 모든 것이 뚜렷해졌다. 단지 돈벌이만을 위한 일이란 그렇게 열정을 쏟을 게 아니라 딱 기대 수준 정도만 하면 되었다. 지금은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일과 사람을 대하는데 정시 퇴근에 휴가를 100% 챙기게 되었다. 노동자는 몸뚱이가 재산이다.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을 잘한다는 건 적게 일하고 많은 보상을 받는 사람일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을 반길 회사가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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