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용범 Oct 25. 2022

636. 멸사봉공? 나는 싫은데

금감원 실태 평가를 마친 저녁 자리였다. S 차장으로부터 ‘멸사봉공’이란 말을 듣고 거부감이 확 들었다. 이유는 있었다. 지난 금요일, 실태 평가 첫날임에도 고모님 조문차 오후부터 휴가를 낸 것에 불만이 컸나 보다. 퇴근 후에 갔어도 되지 않았냐는 말이다. 그날 직원들이 받았던 스트레스가 상당했나 보다. 이해는 된다. 처음엔 나도 부산까지 가야 하는 조문을 망설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조문을 마치고 다음 일정을 소화하려면 그 시간에 꼭 가야 했었다. 그날 저녁은 내가 진행해야 할 독서모임이 있었고, 다음날엔 아침부터 시작되는 학원의 마지막 수업과 스터디 모임 발족, 저녁엔 대학원 모임도 있었다.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니 그건 사적인 일이었지 않았냐고 했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 ‘멸사봉공’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서 본인 스스로 작심하고 하는 말이라는 전제가 붙긴 했다.

멸사봉공, 선공후사라는 말은 공적인 것을 사적인 것에 우선시한다는 말이다. 3년 전이라면 이 말을 들었을 때 거부감이 좀 덜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는 종종 회사 일을 우선하며 개인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개인적인 일도 회사 일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우선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의 스탠스가 달라진 것일까?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속마음은 달라진 게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먼저 할 뿐이다. 그때는 회사 일을 더 좋아했고 지금은 사적인 모임이나 개인적인 일에 끌릴 뿐이다.


직접적인 계기는 있었다. 코로나 이후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는 설계사 조직을 보면서 그간 애정을 지녔던 영업관리라는 업무에 심한 회의가 들었다. 여기에 관리자로서 책임을 떠안으며 받았던 몇 차례의 징계처분은 더 이상 상머슴도 될 수 없게 만들었다. 노동자는 옛날로 치면 머슴이다. 회사에 대해 주인의식을 가지라고 하지만 팩트는 내가 주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주인이 아닌 머슴의 입장에서 보면 일은 적게 하고 새경은 많이 받는 것이 똑똑한 머슴이다. 물론 주인의 입장에서는 새경은 적게 주고 일을 더 많이 시키는 게 좋긴 하다. 일을 주인 혼자 하기 힘이 드니 머슴 위에 머슴을 두어 주인처럼 행사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머슴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는 일을 찾기로 했다.

아무튼 그 후로 개인적인 활동들을 늘리고 다양한 외부 만남들을 시작했다. 이제 회사의 직명은 퇴근과 동시에 조용히 내려둔다. 개인 활동으로 만나는 이들에게 나는 1인 기업을 준비하는 대표이기도 하고 봉사직의 사무국장, 회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어느새  N잡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일들이 오히려 재미있다. 회사의 일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하는 일들이 많지만 N잡러로서의 일들은 내가 선택했고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다. 돈도 되면 더 좋겠지만 그건 어느 정도 일이 완성되어 체계를 갖추었을 때나 가능할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나는 일을 주도적으로 할 수 없으면 급격히 흥미를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나 보다. 그래서 회사 일도 타 업무에 비해  권한과 자율성이 컸던 영업관리 업무를 오랜 기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 지난 일이다.  S 차장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이제 더 이상 회사에 대한 멸사봉공, 선공후사는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언제부터? 내가 회사의 머슴임을 확실히 깨닫고 나 스스로 주인이 되기로 한 날부터다.

작가의 이전글 635. 가상과 실재의 구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