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와 지정학적 상상력

<지정학의 힘> 저자 김동기 교수의 강의 후기

by 장용범

<한반도와 지정학적 상상력>이라는 대륙 학교 강의를 들었다. 강의 후의 찜찜함은 이토록 요동치고 있는 국제관계에서 우리의 대처능력이 의심스러워서다. 김동기 교수는 앞으로 10년 후의 어느 지점에서 지금을 돌아봤을 때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정학적 패권 경쟁의 큰 분수령이었다는 평가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강의 중 인상 깊었던 내용 위주로 정리해 보았다.

<지정학의 힘> 김동기 교수

미국이 해양세력이 된 계기

미국은 지정학적 위치가 적의 위험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위치가 아니다. 동과 서로는 태평양과 대서양이 막아주고 있고 위로는 캐나다, 아래로 멕시코가 미국을 대상으로 전쟁을 할 나라들이 아니다. 전 세계에 이런 혜택을 입은 나라는 없다. 결국 선택지는 두 가지였는데 우리끼리 잘 살고 말자는 ‘고립주의’를 택하거나 제국을 경영하자는 확장을 선택하거나인데 후자를 택한 이상 항공모함으로 대변되는 해군력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중간에서 끊어 항로를 단축하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했고, 넒은 태평양에서 아시아로 넘어가는데 중간 기지 역할을 할 하와이를 병합하고 필리핀을 점령했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 인도가 손잡다

지도를 펼쳐놓고 러시아와 중국, 이란의 위치를 보라. 여기에 인도까지 더해보라.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나라들이다. 지금껏 미국의 외교정책은 중국과 러시아를 떼어놓는 정책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이들 두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해지고 있다. 여기에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맞짱 뜨는 ‘상하이 협력기구’나 ‘BRICS’는 근래 참여하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나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결국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미국의 제재에 맞선 유라시아 대륙의 큰 나라들이 하나로 뭉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미국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이란과 러시아는 미국의 제재를 받고 있고 중국은 미국과 패권 경쟁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지금은 미국이 일관되게 경계했던 유라시아 대륙의 랜드파워가 커지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미국은 지금 북한이 필요하다

중국의 시진핑은 김정은이 집권한 후 단 한차례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북미협상이 진전되자 연달아 다섯 차례나 만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중국에도 북한이 필요하고 미국에도 남한이 필요하다.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어떨까? 중국은 북한에게 천 년의 적이었고 미국은 70년의 적이다. 최근 들어 미국 브레인들과 전략 연구소에서는 미국이 북한을 대하는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 결과 중 하나가 김정은과 트럼프의 회담이었다. 북한의 비핵화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니 인정할 건 인정하고 북한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 중국을 견제한다는 전략이다. 그런데 북미회담은 왜 결렬되었을까? 미국은 두 개의 외교 안보라인이 가동되고 있다. 하나는 키신저로 대변되는 현실적 국익을 챙기는 측과 또 하나는 네오콘이다. 현실적 국익을 챙기는 차원에서는 북한과 수교해야 하지만 군산복합체기도 한 네오콘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긴장이 유지되는 게 좋다. 지난 회담 결렬은 네오콘의 승리였다.

북한 핵을 바라보는 또 다른 관점

“북한은 언젠가 중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 많은 중국인들은 북핵이 우선 중국에 위협적이기에 북핵을 원치 않는다.”_<중국 화동 사범대 션즈화 교수의 뉴요커 인터뷰 내용>

광화문 태극기 부대 노인들이 들으면 펄쩍 뛸 노릇이지만 북한의 핵이 미국, 중국, 일본 같은 강대국들이 한반도에서 벌일 수도 있는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국가들의 관계는 힘센 놈이 마음대로 하는 조폭의 세계와도 같다. 각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에서 남과 북이 이렇게 대결구도로 가서는 안 된다. 주변 강대국들이 아무리 패권전쟁을 하고 서로 총질을 하더라도 자기들 나라에서 할 일이지 다시 이 땅에서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벌어진 주변국들의 패권 전쟁이 얼마나 많았던가? 최소한 남과 북은 물밑 접촉이라도 해야한다. 지금은 70년대 같은 냉전의 시대가 아닌데 그 시절로 역행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 같아 우려된다.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는 게 병’이라는 말도 있다. 예전에는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만으로 상황 판단을 하던 시절이라 그런가 보다 했는데 유라시아 대륙과 한반도 지정학에 관심을 둔 후로 이 분야 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게 되고 관련 책들을 읽다 보니 새로운 병통이 생기는 것 같다. 아무리 값비싼 외교라도 값싼 전쟁보다는 낫다는 외교가의 말을 생각나게 하는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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