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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용범 Oct 15. 2023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우연히 황창연 신부의 유튜브 쇼츠 영상을 보았다. 102세 되신 할머니가 지난날을 후회하더라는 내용이었다. 할머니가 70세 되던 해 자식들이 여행 가자고 했을 때 ‘이제 곧 죽을 건데 뭐 하러. 그냥 너희들이나 다녀와라’고 했었다. 80이 되어서도, 90이 되어서도 뭔가를 할라치면 늘 ‘이제 곧 죽을 건데’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다 102세까지 살고 보니 지난 30년이 그렇게 아깝더라는 말이다. 요즘은 장례식장을 가더라도 고인들의 연령이 80에서 90대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일까 주말 해안 길을 걷다가 접한 59세의 부고는 특이한 경우였다. 오래전 시절 인연이라 그간 연락도 없었고 외면해도 될 사람이지만 그 상황이 안타까워 약간의 조의금을 보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102세가 될지, 59세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죽기는 죽는다.

후배와 대화 중에 나온 이야기다. 살 만큼 살았는데 더 살려고 병원 찾는 노인들을 보면 자신이 그 상황이면 병원을 가지 않고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겠다기에 아마 그건 어려울 거라고 했다. 최근 내 아버님을 곁에서 뵈니 노인이 병원을 찾는 이유가 더 살려고 찾는 게 아니라 지금 못 견디게 아파서 찾는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병원을 찾아 조치 받고 약을 먹으면 지금의 고통이 덜하거나 사라지는데 안 갈 이유가 없다. 그러니 후배의 생각은 지극히 머리로만 죽음을 보는 헛된 망상일 뿐이다.


살아있으면서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은 어쩐지 헛소리 같다. 오줌보는 터질 것 같아 아랫배가 아픈데 정작 오줌은 나오지 않는 고통, 지금 허기도 지고 맛을 느끼며 식사하고 싶지만 식도에 구멍을 뚫어 죽을 넣어야 하는 고통, 지금껏 온갖 세상의 모습을 보고 살아왔는데 점점 실명으로 사물의 형태가 희미해지는 고통을 직접 겪지 않고 어떻게 죽음을 이야기하겠는가.

노인이 별다른 활동 없이 하루 종일 거실에 앉아 죽음을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하면 결론이 뭐겠는가? ‘의미없다’일 것이다. 일종의 자의식 과잉 상태에 빠져든다. 하지만 육신은 여기저기 아파서 괴롭다고 난리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번에 아시안 게임 롤러스케이트 결승전에서 0.01초 일찍 한 세러머니 때문에 금메달을 놓친 것을 보면 이 말이 실감 난다.


우리는 태어난 이상 살아야 한다. 이제 곧 죽더라도 뭔가를 해야 한다. 내 삶의 끝이 59세가 될지, 102세가 될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100세된 노인이라도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 더 살려고 가는 게 아니라 아프니까 가는 거다. ‘You never know until you try.’ 오늘의 강대국 미국을 있게 한 정신이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정도로 번역하면 될 것 같다. 우리는 살아있는 한 계속 TRY, TRY, TRY 해야겠다. 그게 살아있는 자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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