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작성하는 동의서에 담긴 의미

by 이시호

세계 2차 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에서는 엄청난 규모의 인체 실험이 진행되었다. 단순한 실험은 아니었다. 적국의 포로를 본인과 동등한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는 괴물들에 의해 진행된 실험이었다. 실험 대상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기에 아무런 제한 없는 실험을 할 수 있었고, 인체에 대해 탐구하고 의학을 발전시킨다는 명목 하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실험들이 이뤄졌다. 전쟁이 끝난 후 무분별한 인체 실험에 대한 국제적인 반성이 있었고, 의학 실험을 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연구 윤리 강령이 만들어졌다. 당시 만들어진 강령은 몇 차례 개정을 거치며 더 강화되었고, 현대의 의사들은 연구 윤리를 준수하여 인체에 대한 의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 윤리 강령의 내용은 연구하는 의사만 알고 있으면 되지만, 연구 대상자인 환자가 알고 있어야 하는 내용이 하나 있다. '연구에 대한 충분한 설명에 따른 대상자의 자발적인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충분한 설명'은 연구 방법부터 시작하여 연구로 인해 예상되는 이득과 부작용이 모두 포함된 의사의 설명이고, '자발적인 동의'는 말 그대로 대상자가 그 누구의 간섭도 없이 스스로 판단하여 내린 연구 참여 결정이다. 두 조건이 충족되어야 연구가 시작될 수 있는데, 연구가 시작된 뒤에도 언제든 동의를 철회하고 연구에서 제외될 수 있는 권리를 대상자는 가지고 있다. 연구에 참여하는 환자는, 언제든 철회할 수 있는 자신의 동의가 연구의 기본 전제라는 것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연구에 있어 환자의 동의가 가지는 의미를 확장하여 생각하면, 연구뿐 아니라 환자가 받는 모든 의료 행위에 환자의 동의가 필요함을 알 수 있다. 의료 행위는 결국 환자의 몸에 가해지는 행위이고, 그로 인한 이득과 부작용 역시 환자가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에 대한 비용 역시 환자가 지불하는 것이니, 모든 의료 행위에 환자의 동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동의를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의사의 설명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보통 설명을 하고 동의를 받는 과정을 동의서를 이용하여 진행한다. 동의서는 병원에서 미리 만들어 놓은 양식을 많이 사용하고, 각 의료 행위마다 그에 맞는 설명이 적혀 있어서 동의받는 과정을 간편하게 진행할 수 있게 해 준다.


모든 의료 행위 전에 동의서를 작성하는 것은 아니다. 비싸지 않고, 환자에게 큰 해가 없는 의료 행위의 경우에는 설명과 동의의 과정이 상당히 간소화되는 경우가 많다. "피검사 좀 해볼게요", "주사 하나 맞고 가세요", "약 일주일치 처방해드릴게요" 같은 말 속에는 '딱히 설명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의 위험성은 없을 것으로 예상되고, 환자가 거부 의사를 표시하지 않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진행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반대로 어떤 의료 행위를 받기 전에 동의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의사가 웃으면서 별 일 없을 거라고 안심시켜도, 낮은 확률이나마 의미 있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의료 행위를 앞두고 있다는 뜻이다. 환자가 작성하는 대부분의 동의서에는 '극히 드물게 사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무서운 말이 적혀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동의서를 작성할 때 긴장할 필요는 없다. 위험한 부작용은 말 그대로 극히 드물게 발생하고, 환자가 그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을 들었다면 만에 하나 발생하더라도 빠르게 의사를 찾아 빠르게 처치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동의서의 본래 목적은 부작용에 대한 정보를 포함하여, 환자가 받게 될 의료 행위에 관한 모든 중요 정보를 환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의서에는 왜 이 치료가 필요한지, 어떤 과정으로 치료가 진행되는지, 치료 시간은 어느 정도 소요되는지, 치료를 통해 어떤 효과를 기대하는지, 효과가 나타날 확률은 어느 정도 되는지 등이 모두 적혀 있다. 부작용 정보 중에서는 드물고 위험한 부작용보다 흔하고 불편한 부작용에 대한 정보가 환자에게 훨씬 유용하며, 부작용이 생기면 의사가 어떤 처치를 해줄 수 있는지까지 알아 두는 게 좋다.


의사에게는 환자에게 자신의 의료 행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의무가 의사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환자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 환자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말을 최대한 집중해서 들어야 하고, 집중과 이해에 자신이 없다면 도와줄 보호자와 함께 방문하는 게 좋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이해될 때까지 여러 번 물어봐야 하며, 의사가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면 쉽게 바꾸어 말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어야 한다. 의사의 말을 정확히 기록하고 싶으면 굳이 몰래 녹음할 필요 없이 의사와 합의하여 동의서 작성 과정을 녹음할 수 있고, 동의서 작성 후에도 언제든지 동의서 사본을 요청하여 작성한 동의서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모두 환자의 정당한 권리로, 환자는 권리를 잘 행사하여 스스로 책임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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