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국 드라마에서, 우울해하고 있는 주인공에게 친구가 '너 우울증 약 좀 먹어야겠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특이하게도 한국어 자막으로는 '우울증 약'으로 나오는데, 연기자는 '우울증 약'을 영어로 직역한 'depression pills'가 아닌 '렉사프로(lexapro)'라고 말했다. 드라마 속에서는 그냥 흘러가는 장면과 대사였는데, 대사와 자막의 차이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미국과 한국이 우울증을 대하는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렉사프로는 우울증에 흔하게 처방되는 약의 이름이다. 한국에서는 이 약의 복용자와 의료진을 제외하고는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널리 알려진 약이 아니니 우울해 보이는 친구에게 렉사프로를 권하는 일은 한국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타이레놀을 생각해보자. 대부분의 한국인은 타이레놀이 두통에 좋은 약인 것을 알고 있고, 두통을 호소하는 친구에게 별 고민 없이 타이레놀을 권한다. 같은 원리로 피곤한 사람에게 우루사를 권하고, 관절이 아픈 사람에게 케토톱을 권한다.
어떤 나라의 국민 대부분이 어떤 증상에 효과적인 약을 쉽게 떠올린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증상이 굉장히 흔한 증상이라는 뜻이다. 갑자기 쓰러지는 증상이나 입에 거품을 물며 몸을 떠는 증상에 좋은 약을 아는 국민은 많지 않다. 두 번째는 그 증상을 생기게 한 원인이 크게 비난받거나 크게 슬픈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에이즈처럼 비난받는 병이나 암처럼 슬픈 병은 병에 걸린 사실을 숨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변 사람이 그 병에 좋은 약을 말할 기회 자체가 별로 없다. 한 나라의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는 약의 범위는 그 나라가 인정하는 '걸려도 되는 병'의 범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은 드라마에서 렉사프로가 등장하는 나라다. 미국인 대부분이 우울증을 걸려도 되는 병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우울한 증상이 굉장히 흔하고 우울증이 비난받거나 슬픈 병이 아니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혹시 한국인들이 항상 행복해서 렉사프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한국이 OECD 자살률 1위라는 사실에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살과 우울증은 밀접한 관련이 있고, 한국이 미국보다 우울한 증상을 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라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렉사프로가 유명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에서 우울증이 비난받는 병이거나 슬픈 병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정신 질환으로 인해 자신 또는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환자들에게는, 대부분 의심 증상이 나타나고 몇 년 동안 아무런 치료도 받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신 질환의 특성상 본인의 정신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족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가족들이 억지로라도 최대한 빨리 병원에 데려와야 회복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들이 정신 질환을 '나약해서 걸리는 비난받아 마땅한 병', '머리에 이상이 있어 생기는 슬픈 병'으로 인식하여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다면 비극이 시작된다. 정신 질환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정신 질환의 진단을 늦추고, 치료를 어렵게 하며, 불필요한 죽음을 불러오는 주요 원인이다.
의사들은 정신 질환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몸의 건강만큼 정신의 건강도 중요시하기에, 다른 병으로 치료받는 환자가 조금이라도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면 정신과 진료를 권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환자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환자에게 정신 질환이 있다고 의심해서 권유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병에 걸리면 슬픈 게 당연하고 정신적인 고통이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고통이 커져서 새로운 병이 되거나,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기존의 치료가 방해받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혼자서 이겨낼 정도의 고통이라도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효과적으로 회복할 수 있다. 정신과 진료를 권유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자의 행복을 위해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의 환자는 권유받은 정신과 진료를 거부한다.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거나 심지어 화를 내는 환자도 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우울증과 한국인이 가진 우울증 사이의 거리가 아직 많이 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우울증을 감기처럼 친숙한 병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으로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우울증은 아직 '마음의 에이즈', '마음의 암'이다. 의사들이 좀 더 노력하여 렉사프로가 많은 한국인에게 익숙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우울증이 정말 마음의 감기가 될 것이고 한국인들은 더 행복해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