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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호 Apr 01. 2020

내공의 차이

인턴들의 무협지

‘내공’이라는 것은 무협 소설에 자주 나오는 개념인데, 정신적인 수련을 거쳐서 형성되는, 몸속에 축적되어 보이지 않는 힘을 의미한다. 인턴들 사이에서 내공은 예정에 없던 새로운 일이 생기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의미한다. 새로 생기는 일이 적은 사람은 ‘내공이 좋다’고 하고, 자꾸 응급이 터지면서 일이 새로 생기는 사람은 ‘내공이 나쁘다’고 한다. 내공이 나쁜 사람은 ‘환타(환자를 타는 사람)’라고 불리기도 한다. 내가 새로 창시한 단어는 아니고, 병원에서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개념이다.


하필 내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적합한 단어가 없기 때문이다. 뭔가 운이라고 하기에는 경향성이 뚜렷하다. 1년 내내 내공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극명히 갈리는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 어떤 수련을 거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냥 ‘내공’이라는 말 자체가 웃기다. 사실 엄청 웃긴 건 아닌데, 인턴 때는 이렇게라도 웃어야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이 많아 힘든 현실을 해학적으로 풀어낸 것이 내공이 아닐까 싶다.


응급 상황 발생 여부에 따라서 업무 강도가 확연히 차이가 나는 인턴의 특성상, 인턴들은 이 내공에 굉장히 민감하다. 똑같은 근무를 해도 누구는 하루 종일 뛰어다니고, 누구는 푹 자다가 퇴근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바로 내공이다. 서로 반대의 내공을 가진 두 인턴의 삶을 예시로 들어보겠다.


#내공이 좋은 인턴의 삶

그날 해야 할 일을 출근하자마자 빠르게 끝마친다. 전화가 안 온다. 친구들과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 여전히 전화가 안 온다. 식곤증에 깜빡 졸다가 일어나서 TV 좀 봤더니 퇴근 1시간 전이다. 전화가 온다. 응급 CT 검사가 있단다. 드디어 일하는구나 하고 가려고 했더니 다시 전화가 온다. 검사실에 환자가 밀려서 최소 1시간은 있어야 가능하단다. 내공이 좋으면 있던 일도 사라진다. 다시 쉬다가 정시 퇴근한다.


#내공이 나쁜 인턴의 삶

출근하자마자 응급 CT 검사에 가야 한다고 전화가 온다. 왜 항상 앞 인턴의 일은 나에게 넘어오는 걸까 생각하면서 출발한다. CT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전화가 온다. 병동에 급한 일이 생겼으니 바로 와 달란다. 끝나자마자 달려가서 열심히 일을 처리한다. 잠깐 짬이 나서 컵라면에 물을 붓는 순간 또 전화가 온다. 결국 밥도 못 먹고 일하다가 30분 정도 초과 근무 후 한숨과 함께 퇴근한다.


환타(내공이 나쁜) 인턴을 보고 있으면 처음에는 그냥 재밌다. 수다 떨다가도 전화받고 뛰어나가고, 어떤 날은 허세를 부리며 배달음식을 시키자고 하더니 잠시 후 연락 두절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다 못 참고 다 먹을 때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환타 인턴과 같이 일을 하게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지금 힘든 것이 환타 인턴 때문이라는 근거가 단 한 개도 없는데도, 다른 인턴, 레지던트에 어떨 때는 교수님까지 반 농담으로 너랑은 일 못하겠다고 공격한다. 그러면 또 우리 환타는 모든 게 자기 잘못인 양 여기저기 사과하느라 바쁘다. 참 웃픈 상황이다. 


환타 인턴의 악명만큼 내공이 뛰어난 인턴의 여유도 금방 유명해진다. 항상 인턴 방에 앉아서 시시덕거리고 있다가, 전화가 너무 안 와서 전화기가 고장 났는지 확인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때는 웃기면서도 얄밉다. 그래도 같이 일하면 정말 편하기에 함께 일하고 싶은 인턴 0순위이다. 가끔 환타 인턴과 내공이 좋은 인턴이 함께 근무할 때가 있는데, 누구의 내공이 더 강한 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승률은 거의 반반 정도였던 걸로 기억이 난다. 우리 중 최강 환타의 인턴 끝날 즈음 허세 가득한 합리화가 기억에 남는다. ‘난 환타라서 일을 참 빨리 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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