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시호 Apr 08. 2020

편한 곳에서 느낀 쓸쓸함

의룡과 함께

작은 2차 병원에도 자잘한 일을 할 인턴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병원에서 인턴을 뽑는다 공지를 해도 아무도 지원하지 않을 것이기에, 가까운 큰 병원에서 매달 몇 명씩 인턴을 지원받는 계약을 하는 식으로 인력을 확보한다(월급은 작은 병원에서 준다). 내가 일한 병원은 세 곳의 병원에 인턴을 파견하였는데, 7월에 주변의 공공 병원으로 파견되어 근무를 하였다.


그 병원에는 3명의 인턴이 파견되었고, 한 번에 1명의 인턴만 일하는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낮 인턴 A가 12시간 일하고, 밤 인턴 B가 12시간 일한다면, 남은 한 명 C는 24시간 동안 근무가 없는 오프 상태가 된다. 이론상으로는 2일 일하고 1일 쉬는, 본 병원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편한 근무가 가능한 환경이었다.   


주요 업무는 병원에 있는 환자 전체의 드레싱을 하는 것과, 다 하면 응급실에 상주하며 응급실에서 새롭게 생기는 일을 하는 것이다. 작은 병원인만큼 응급실의 규모도 작고, 환자도 많지 않아서 응급실에 하루 종일 있어도 새롭게 생기는 일 자체가 거의 없었다. 12시간 일한다고 하면 실제로 뭔가를 하는 시간은 2-3시간 정도였다.


이처럼 다른 병원에 파견을 가면 몸이 매우 편하다. 그나마 힘든 점을 찾자면, 원래 병원이랑은 거리가 좀 있어서 출퇴근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몸이 편하고 일이 적기 때문에 찾아오는 무기력감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 힘든 한 달이었다.


근무 중 응급실에 가만히 앉아있어야 하는 시간이 8시간 정도인데,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는다. 다른 의사로는 그 병원에서 일하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1명이 있는데, 보통 당직실에 있다가 환자가 오면 전화를 받고 나온다. 간호사도 그 병원 소속으로 한 번에 3명이 일하며 알아서 일하고 쉬고 하였다. 나에게는 대화를 할 사람이 전혀 없는 환경이었다. ‘사람은 하루에 2만 단어를 말한다’ 그런 말이 있는데, 나는 12시간 동안 100마디를 안 했던 것 같다. 출근해서 ‘안녕하세요’ 하고, 누가 뭐 시키면 ‘네’ 하고 가서 환자에게 몇 마디 설명하는 게 하루 대화의 전부였다.


3월부터 몇 달 내내 바쁘고 시끄럽게 일하다가 말 한마디 안 하고 얌전히 앉아 있는 삶을 일주일 정도 살았더니 무기력감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우울증 비슷한 증상들이 생겼다. 퇴근하면 폭식을 하고, 몸의 에너지를 거의 쓰지 않으니 잠도 잘 안 오고, 잠을 잘 못 자다 보니 피로가 상당했다. 2주쯤 지나니까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겨우겨우 출퇴근만 하는 좀비 같은 상태가 되었다.


그래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시간 때울 거리를 찾다가 결국 휴대폰으로 만화를 보는 것으로 무기력감을 해소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루에 8시간씩 다양한 만화를 섭렵하였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만화는 ‘의룡’이라는 일본 의학 만화이다. 천재 흉부외과 의사(주인공)와 그에게 배우며 성장하는 인턴이 나온다. 나는 인턴이다 보니 주인공이 아닌 인턴에게 자꾸 감정이입이 되었다. 인턴이 역경을 이겨내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응급실 구석에서 조용히 찔끔 눈물을 흘리곤 했다.


내가 꼽는 ‘의룡’의 최고 명대사는, 환자가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빠진 인턴에게 천재 의사가 하는 말이다. ‘의사는 자기가 죽인 환자의 수만큼 성장해.’ 나는 이 대사를 접한 후, (내가 죽이진 않았지만) 병원에서 죽는 환자들을 통해 더 많이 공부하게 됐고, 얻은 지식을 다른 환자에게 적용함으로써 몇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의룡’의 최고 명장면은 마지막 장면이다. 천재 의사가 모종의 이유로 병원을 떠나는 길, 인턴은 가장 존경하는 스승인 그를 따라 나와 '아직 배우고 싶은 게 있다'라고 뒤에서 소리친다. 그때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인턴 옆을 지나 병원으로 들어가고, 인턴은 구급차를 보자마자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 응급실로 달려간다. 천재 의사는 달려가는 인턴의 뒷모습을 보고 '드디어 의사가 됐구나. 축하한다'라고 읊조린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환자를 살리는 것보다 중요하지는 않다는, 의사의 책임감과 직업의식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는 찔끔 보다는 눈물이 많이 나왔다.


7월의 파견 근무는 뭔가 무기력했지만, 좋게 생각하면 편한 근무 환경을 통해 몸에 쌓였던 피로를 한 번 풀어줌으로써 다시 나아갈 원동력을 얻었다. 또한 '의룡'이라는 스승을 만나 좋은 의사에 한 발짝 다가간 한 달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내공의 차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