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번 쓰자면, 나도 계획은 있었다고
여행이나 데이트를 할 때, 계획을 하거나 어딜 갈지 무엇을 할지 찾는 것은 사실 거의 나의 몫이었다. 신랑은 어딜 가든 무엇을 먹든 나와 함께라면 다 좋다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 놓고 기껏 찾은 맛집에 웨이팅 40분 하고 들어가서 먹었을 때 그는 말했다. "와, 사람들 미쳤다. 이걸 40분 기다려서 먹다니. 그지? 되게 별로지? 역시 맛집은 마케팅이라니까" 그러면 내가 대답했다 "즈응이해. 다들린다그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해")
우리는 개그코드와 정치적 성향,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았으나 취향이 다르고 입맛이 달랐다.
당연히 여행관도 다를 것은 불 보듯 뻔했기에 나의 의지와 강요로 결정된 첫 유럽여행이었기에 신랑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다.
나는 사실 여행을 가기로 했으면 가는 거고, 가서 찾아봐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신랑의 화에 공감할 수가 없었다.
사실 가기 전에 세븐틴 나나투어 나온 맛집을 검색해서 뽑아갈 생각이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감정과 생각을 굳이 전달하여 신랑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신랑은 사실 이 여행을 가고 싶어 한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이 여행은 내가 추진한 것이었는데 신랑 혼자 준비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다니…
어렵게 결정한 유럽여행인데, 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 것인가? 여행을 가서 무엇을 볼 지, 무엇이 위험한지, 현지에서는 어떻게 이동을 할 것인지? 심지어 한 끼를 먹어도 맛집을 검색해서 사 먹는 사람이, 왜 이탈리아의 맛집 같은 것도 찾아보지 않는 거냐며 화를 냈다. 신랑은 내가 일할 때처럼 철저하게 하지 않는 것인가? 난 당신이 여행 계획을 정말 잘 짤 줄 알았다. 그런데 여행 리뷰 영상 하나 찾아보지 않고 세븐틴만 보고 있지 않은가?
신랑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불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세븐틴의 나나투어를 따라 여행할 계획이 있었지만, 그 계획을 신랑과 공유하지 못했고 실제로도 여행 준비보다는 방송 일에 많은 시간을 쏟고 있었다. 그 외의 시간엔 세븐틴 영상에.
신랑은 자기보다 세븐틴이 더 좋은 게 아니냐는, 자신을 볼 때보다 세븐틴 영상 볼 때 더 행복해 보인다는 나름 합리적인 의심을 추론해 제기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어떻게 남편과 덕질하는 최애들을 비교한단 말인가? 최애들의 영상을 볼 때는 행복하다기보다 즐겁다. 행복과 즐거움은 굉장히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 전혀 다르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선 즐거움은 일시적인 감정이다. 외부의 자극이 주는 순간적인 만족감인 것!
그러니까 맛있는 걸 먹을 때 즐겁고, 나의 기분에 딱 맞는 음악을 들을 때 즐겁고, 머리를 딱 치는 글을 발견했을 때 즐겁고, 우리 세봉이들이 형제애 뿜뿜 뿜으며 노는 모습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즐거움이다.
반면에 행복은 외부적인 자극이 아니라 내 안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바로 신랑과의 삶 자체가 나의 내면을 평온하게 하고 안정되게 만들고 또 긍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니 신랑은 나에게 행복의 필수 조건이고, 세븐틴은 즐거움의 충분조건이다.
그래서 쥐꼬리만 한 억울함은 꾹꾹 숨기고, 신랑의 불만을 해소해 주기 위해 신랑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신랑은 자신의 감정이 다소 잦아들었을 때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꼭 이탈리아 여야해? 스페인을 가도 되지? 스페인어는 배우면 좀 더 동기가 생길 것 같아. 나중에도 쓸 수 있고”
세븐틴의 나나투어 따라하기 여행계획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행복이 스페인을 원한다니, 행복을 따라야지 뭐 어쩌겠는가?
나는 정말 단 3초도 생각하지 않고 아주 빠르고 즉각적으로 대답했다.
“난 스페인도 괜찮지! 그렇게 하자. 비행기표도 바꿀 수 있어”
이게 신랑과 나의 차이다.
나는 서운함을 티내지 않지, 티가 나면 그건 화가 난 것임을 신랑이 알아야 할텐데...
아직도 나의 신랑은 그걸 모른다.
농담반, 진담반이고...
사실이 그러했다. 이탈리아면 어떻고, 스페인이면 어떠한가?
신랑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하게 여행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나는 이탈리아도, 스페인도 처음이었다. 그냥 우선 유럽이라는 땅에 발을 닿고 있는다는 것 만으로 행복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예상이 되었으므로 신랑의 마음이 편하다면 언제고 스페인으로 예약을 변경할 수 있었다. 사실 이때까지 호텔은 예약하지도 않았으니까. 취소하는 것도 그렇게 큰 일이 아니었다.
우린 스페인으로 여행지를 변경하고 비행기표도 다시 예약했다.
또 이렇게 저렇게 비행기표를 검색하다 보니, 이스탄불이 보였다.
그래서 난 바르셀로나 in/마드리드 out/이스탄불 in/out행 비행기를 예약했다.
이번에는 취소 불가 옵션으로.
뜬금없는 이스탄불이 등장하자 신랑은 진짜 뜬금없다는 표정과 말투로 내게 말했다.
“이스탄불? 왜?”
"이스탄불은 내가 정말 잠깐 들렀던 곳인데, 너무 좋았어!
이번에 가지 않으면 언제 또 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꼭 가야 해!"
신랑은 뜬금없는 곳이었지만 나에게는 뜬금없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20대 시절 처음으로 해외 촬영을 나갔을 때가 브라질이었다. 브라질에서 일주일 정도 보내고 돌아오는데 이스탄불을 경유했고, 돌아오는 길에 6시간 경유 시간 동안 잠깐 이스탄불 시내 택시 투어를 했는데, 너무 좋았다. 한국에서 왔다는 우리에게 형제의 나라라며 블루모스크와 금문각을 보여주며 뭐라 뭐라 설명을 해줬던 택시기사! 그가 내려준 곳에서 가장 가까운 케밥집에 들어가서 먹었던 케밥! 바로 옆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거기 전시되어 있는 비싼 액세서리를 직접 차 보라고 권하던 사장님부터 수줍은 표정으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내게 선물로 줬던 아르바이트생까지!
모든 게 완벽했고 마치 온 도시가 우리를 환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브라질에서는 일을 하느라 정신도 없었고, 음식이 하도 짜서 입맛에 안 맞았는데 터키에서 먹은 케밥은 정말 맛있었다. 게다가 촬영을 끝냈다는 후련함도 터키에서의 잠깐 여유가 더욱 즐겁게 느껴지는 이유였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처음 읽은 여행기 책이 터키 여행기였다.
방송작가가 쓴 책이었는데, 세계여행 도중 터키에서 꽤 오랜 기간 보내며 터키 사람들과 살아간 일상이 담겼었다. 자세한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그 책을 읽었을 때의 그 감동이 남아있었다.
타국에서 느끼는 이색적인 감정, 새로운 세계에 대한 설렘.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 자유로움.
터키는 나에게, 아직까지도.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 터키는 뜬금없지만 빠질 수 없는 여행지였다.
사실 이탈리아가 아니라 스페인으로 여행지를 옮긴 것에 대한 어떤 보상 심리로 내가 기대했던 여행지가 들어갔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다.
신랑도 그걸 캐치했는지, 본인은 뜬금없다 여겼던던 이스탄불 여행에 동의해줬다.
그리고 덧붙였다.
"여보는 이스탄불에 환상이 있는 것 같아. 가보면 알겠지"
나의 신랑은 정말, 도사다! 이렇게 잘 맞출 거면 로또 번호나 좀 맞춰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