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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여행 계획이 다를 때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다 계획이 있었다고.

by 하담

신랑의 동의(사실상 강탈이었으나)가 떨어지자마자 비행기를 예약하기 위해 살펴보았다.


당시 비행기 표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두 가지였다.

첫째, 한국 항공사의 비행기일 것.

둘째, 직항일 것.


그 사이 나의 늙고 조심성 많고 준비성 철저한 반려인이 유튜브로 해외여행을 하다 곤란에 처한 영상들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해외 항공사의 비행기를 이용했다가, 경유했다가 짐을 잃어버렸다.’는 내용이었고 나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겠는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너무 먼저 걱정하는 건 아닌가? 생각했으나, ‘그런 사고는’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일이기에 미리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랑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했다.


‘그래 봐야, 몇십만 원인데. 그걸로 우리 서방님의 마음이 편하다면 싸게 먹힌 거지!’

‘돈 벌어서 뭐 해? 첫 유럽 여행인데, 이 정도는 쓸 수 있지, 우리의 여행은 가성비가 아니라 가심비다!’


그럼에도 ‘시가’인 항공권 중에 최적의 우리 비행기를 찾기 위해 얼마간 네이버 포털에서 검색하고, 항공권 가격 비교를 해준다는 스카이스캐너(Sky scanner)도 매일 검색하다가 결국 대한항공 홈페이지로 11월 초 일정으로 ‘로마 in/out’ 직항 비행기를 예약했다. 공식 홈페이지였기에 여행을 가기 한 달 전까지는 무료로 취소가 되는 표로 기억한다.


나는 안식년 계획을 구체화한다는 핑계로 사실상 백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거라곤 밥 먹고 세븐틴 영상 보고 온라인 강의를 몇 개 보는 게 다였고, 신랑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게 한 치의 눈치도 주지 않았다.

밤에 누워 하루를 복기할 때면, ‘오늘도 하루를 쓰레기통에 버렸구나.’ 싶어 나 스스로만 괴로워했다.

그러면서도 딱히 적극적으로 뭔가를 하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살았던 나를 위해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상들을 보내 보는 것이 손해이지 않을 것 같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이것도 다 핑계지만.


이런 잉여 생활에도 익숙해져 갈 때쯤, 좀처럼 외출을 즐기지 않는 것 같은 신랑이 (외출을 즐기지 않는 것 같다는 것은 나의 추측이다. 집에서 푹 자고 본인이 낳았어야 할 손흥민을 볼 때 가장 편안해 보이는 그 이기에 나 혼자 유추한 신랑의 성향이다. 후에 신랑에게 물어보니 대답했다. “여보랑 나가면 어디든지 좋지! 데이뚜, 데이뚜!” 이게 연륜인가 보다) 내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안식년을 선언하고 영어공부를 하겠다던 나에게 맞는 영어 책을 사고, 본인은 여행을 대비해 이탈리아어 책을 사자는 것이었다.


우리는 광화문의 교보문고로 갔고, 나보다 더 신난 신랑은 몇 권의 이탈리아어책을 고르고 내게도 초심자가 공부하기 편한 영어책을 권해줬다. 나는 꼴에 또 영국 영어를 배워야겠다며 영국 영어책 교재를 찾았으나 딱히 마땅한 것은 찾지 못했다. 신랑은 영국 영어든 미국 영어든 우선 시작하자고 했고 우리는 그날부터 같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부부가 되었다.


나와 달리 영어를 어느 정도 구사하는 신랑이 이탈리아어를 공부하는 모습은 존경심이 들면서도 어느 한 편에는 왜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돋보기를 쓰고 이탈리아어 동사 변형을 외우고 있는 신랑에게 물었다.


"여보, 여보는 영어를 하는데, 왜 이탈리아어까지 배우려고 해?"


신랑은 답했다.


"여행은 그 나라의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는 거잖아. 짧은 시간에 그들과 교감을 조금이라도 하려면, 그 사람들이 하는 언어를 미숙하게라도 구사하는 게 좋지 않겠어? 여보도 외국사람들이 한국어로 말하면 반갑잖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영어를 당연하게 할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야. 영어는 그들에게도 외국어니까"


그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더 안심했다. '나는 영어도 이탈리아어도 못하는데, 내 신랑은 영어도 하고 이제 이탈리아어까지 한다니!! 나는 개꿀이구나!'


핑계 같지만, 영어를 하고, 이탈리아어까지 공부하는 내 신랑 덕분에(?) 나의 영어 공부 욕구는 점차 힘을 잃고 있었다.

비행기표만 사놓고, 안식년이라 쓰고 백수라 부르는 기간을 보내는 동안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작년에 작가이자 PM으로 참여했던 프로그램의 후속이 확정되었는데, 이번에도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결국 안식년에 일을 하는 사태가 발현되었다. 다행히 촬영까지만 맡고 후반 작업을 할 때는 별 일이 없을 것이라 했고, 우리의 여행 전에 촬영이 끝나는 스케줄이었기에 '다른 계획은 모두 뒤로 밀더라도 여행에는 문제없게 하겠다.' 신랑에게 말했다.


그런데 신랑에게 현타가 찾아왔다. 공부를 해도 늘지 않는 이탈리아어에, 비행기표만 사놓고 전과 똑같이 일만 하는 나의 태도까지 신랑을 화나게 만든 것이었다.


(내가 맡았던 일은 생각보다 신경 써야 할 것이 상당했고, 백수 기간에 주 일과였던 세븐틴 영상 보기 시간은 고수되었기 때문이다. 변명을 하자면 이것도 여행을 준비 과정이었다. 나는 이탈리아 여행을 가서 세븐틴의 여행 코스를 그대로 다녀볼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이건 자료조사와 같은 행위였지만, 굳이 신랑에게 공유하지 않았다. 최근 들어 자신이 세븐틴보다 아내의 우선순위에서 밀린 게 아닌지 의심하는 그에게 괜히 말하면 그 의심에 확신을 더해 줄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더불어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 싫어할 까봐 말을 못 했다.)


신랑은 내게 토로했다.


"이탈리아어 너무 어려워! 진도가 안 빠진다고, 나이 오십 넘어서 다른 외국어를 공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여보는 몰라. 일주일 잠깐 쓰려고 이걸 공부하는 내 심정을 알기나 아냐고?"


내가 공부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었기에 억울한 맘이 있었지만, 그가 이탈리아 여행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기에,

모든 화근의 시작은 나의 유럽 여행에 대한 욕망 때문이었기에 나는 항변하지 않고 그의 말을 계속 들었다.


"스페인어면 모를까… 스페인어는 쓸모라도 있지"


우리를 모르는 독자들은 '이탈리아어나 스페인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싶겠지만 달랐다.

왜냐하면 우린 '아르헨티나 탱고'를 추고 있었는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쓰고 있고, 탱고 용어부터 현지에서 한국까지 오는 선생님들까지...


스페인어는 우리에게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탈리아어보다 훨씬 더 실용적인 외국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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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수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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