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에게 유럽여행을 강요하다 결혼 10주년은 핑계지만, 먹혔다
올해로 결혼한 지 만 10년이 된 나는, 결혼에 대한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건 바로 신랑 덕분,
신랑은 나와 15살 차이가 나는데.
위로.
신랑을 처음 봤을 당시, 신랑과 결혼은커녕 연애를 할 거란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당시에 본인은 다소 인격적으로 부족한 사람이었던 지라 남자에 대한 편협한 시선이 있었다.)
그런데 신랑을 지켜보니 ‘저런 남자랑 살면 평생 존경하면서 살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 남자 말고!’
그러나 인생과 운명은 생각한 대로만 되지는 않고, 나는 평생 살면서 존경할 만한 새로운 남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란 결론을 내고 나의 신랑에게 먼저 청혼을 했다.
그 사이의 여러 가지 좌충우돌 인생만사는 각설하고,
결혼하면 3년 정도 좋을 거라는 진심이 담긴 주변의 조언과는 달리 5년까지도 좋더니, 어라? 10년이 되고도 더 좋은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다.
여기서 나와 나의 동반자에 대해 잠깐 소개하는 시간을 갖자.
나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열정, 불안, 막무가내이며, 신랑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신중, 안정, 대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결정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냥 뛰어들고 시도하는 편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결혼 때 일화를 하나 말하자면, 신랑에게 결혼하자고 내가 먼저 청혼했을 때 우리 집에도 결혼 소식을 알려야 했다.
아빠 나름 혼자 애지중지 키운 딸이 나였기에 15살 많은 신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빠는 신랑을 보지도 않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전화해서 서울에서 방송작가 한답시고 이상해졌다느니 '그만큼 나이 많고 좋은 사람은 자기 주변에도 많으니' 자기 주변의 남자들을 한 번 만나보라고 청했다.
나는 한결같이 말했다.
그냥 ‘나이 많은 남자’ 말고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나이 많은 남자’를 원하는 거라고.
그러면서 신랑과 결혼식을 알아보러 다녔다. 그러다가 괜찮은 예식장을 찾았고, 어김없이 나를 말리기 위해 아침에 전화한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좋은 예식장을 찾았어! 이날하고 이날 중에 언제가 괜찮겠어?”
“이날보단 이날이 괜찮지.”
“OK, 그날 결혼함!”
그날 이후 상견례하고 결혼까지 별 탈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나의 결혼을 허락한 적이 없었고, 나는 나의 결혼을 허락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결혼에 필요한 건 결혼하는 두 사람의 결정, 그리고 시도뿐 인 것이다.
나의 신랑의 경우 매우 신중하며 안전한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데…
연애를 할 때, 나는 늦게 끝난 후 택시를 타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신랑은 늦은 시간 택시를 타는 것이 위험하다고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가능성뿐만 아니라, 졸음운전의 가능성 때문이다.) 퇴근 후 매일 회사 근처에서 나를 기다리다 데려다줬다.
새벽 한, 두 시에 나와보면 피곤에 찌들어 자고 있는 신랑이 있었고, 나를 집에 데려다주고 정작 본인은 집에 가지도 못하고 우리 집 주차장에서 잠을 자다가 내가 출근할 때 발견되곤 했다.
(남들이 보기에 믿을 수 없을지 몰라도, 결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신랑은 누가 날 집어 갈까 봐 전전긍긍, 내가 살짝 다치기만 해도 애지중지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해외여행은 굉장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불필요한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것.
게다가 나의 늙은 신랑은 뚜렷한 여행관이 있었다. 진정한 여행이란 그 나라 사람들의 삶에 어울려 보는 것, 그 나라의 언어를 써보고 그 나라의 문화를 진실로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랑은 단기간 해외여행을 하는 것에 대한 별 흥미를 못 느꼈고, (사실 흥미는커녕 세상 쓸데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나는 그런 그와 함께 유럽 여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유치하고 치사할지언정, 신랑의 죄책감을 건드려서 YES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방법.
우리는 10년 전 신혼여행을 전국 투어로 했다.
당시 나는 터키에 가고 싶었는데, 터키는 내전 중이었기에 신랑은 동남아 휴양지로 신혼여행을 제안했다.
(아마 코타키나발루였던 것 같은데, 잘은 기억나지 않는다.)
10년 전의 나는 내 취향도 제대로 몰랐고, 약간의 허세도 있었기에 휴양지로의 신혼여행은 가고 싶지 않다며 ‘차라리 전국 투어를 하자, 안 가본 대한민국도 많으니!’라고 제안했다.
이 제안은 결혼 직전에 맡은 프로그램 섭외를 원활하게 할 요량이었으나 신랑은 그때 신혼여행을 국내로 간 것에 대해 내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신랑의 죄책감과는 별개로 그때 인천, 전주, 통영 대전을 거쳐 서울로 왔던 신혼여행은 나에게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고 너무 좋았다.
당시에 우린 어딜 갈까 정하지 않고, 저녁에 다음날 어딜 갈까 이야기를 나누며 즉흥적으로 여행할 도시들을 선택했는데, 그래서 더 좋았다. 서로 상의하면서 다음 여행지를 결정하고, 숙소를 정하고, 함께 손잡고 걸어 다니다가 보이는 밥집과 커피숍에 들어가고 나는 잠깐 틈 날 때마다 내가 일을 하고(대부분은 연예인 매니저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기획안을 보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디서든 노트북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 신랑은 옆에서 이것저것 딴짓을 했다. 일을 하는 중간이었지만 너무 평온한 했다. 지금 기억으로는 당시 섭외도 취재도 그렇게 힘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다행히도.
예상보다 순조로웠던 업무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대한민국에서 30년 살면서도 가보지 않은 곳을 탐험하면서 느낀 아드레날린 때문인지, 나는 전국 투어 신혼여행이 꽤 만족스러웠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은 이렇게 따뜻하구나 생각했었다.
이렇게 좋은 여행을 유럽에서 하면 얼마나 더 좋을까?
나는 상상만 해도 좋았지만, 신랑은 썩 내켜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우리 결혼 10주년이잖아. 신혼여행도 외국으로 못 나갔잖아. 이러다가 비행기 한 번도 못 타고 죽는 거 아니야? 나 비행기 타는 거 좋아했는데…”
적절하게 이번에 유럽 여행을 가야 한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워딩에 신랑은 결국 직장에 긴 휴가를 신청하기로 했다.
이렇게 신랑에게 강요해서 뜯어내다시피 한 여행계획이었기 때문일까?
결혼 후 성숙해져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바뀌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이 남자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의 심기를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는 이후 내내 신랑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유럽 여행을 신랑도 즐길 수 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