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디페렌테' (다른삶) 20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수도 딜리로부터 230km 정도 떨어진 로스팔로스는, 내가 처음 왔던 8년 전에는 차로 8시간 정도 걸렸다. 지금은 5~6시간이면 된다. 230km가 그 정도 걸리는 것은 당연히 길이 안 좋아서다. 구불구불한 곳, 비포장 구간, 울퉁불퉁 패이고 꺼진 곳이 많다. 그도 아니면 도대체 여기 왜 어떻게 이런 게 생겼을까 하는 구멍이 나타난다던가, 물소떼나 야생말떼, 양떼가 심심치않게 나타나니 속도가 자연스럽게 느려진다. (눈과 마음은 설레지만!)
도로뿐이랴, 대중교통도 사정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해 온 20인승의 작은 버스가 딜리와 동티모르 다른 지역 곳곳을 다닌다. 버스는 거의 개인의 소유. 지역유지-부잣집에서 버스 몇 대를 소유하고, 기사를 고용해 운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운송회사 규모는 아니다.
처음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야간버스를 한 번 탄 일이 있었다. 운영 시간만 야간이지, 버스는 똑같은 버스다. 운영 시스템 역시 똑같다. 전화로 예약한 손님 집 앞으로 데리러 가고, 버스를 타고 가면서 큰 소리로 모객을 하기도 한다. 버스 운영에 있어 운전을 제외한 모든 다른 것들, 즉 예약 접수와 확인, 짐 내리고 올리기, 손님들의 집 찾기 등등은 전부 꼰작의 몫이다. 꼰작은 비행기로 따지자면 스튜어디스인데 버스에 자리가 없으면 (보통은 자리가 없다!) 그냥 차량 문에 매달려 몸의 반은 밖으로 내어놓고 울퉁불퉁한 길을 계속 달리게 된다. 오늘 밤버스의 꼰작은 마리아노라는 아직 고2 정도 되는 학생인데, 오지랖퍼 K가 말을 걸었더니, 이야기를 곧잘 한다. 고등학생으로 학비를 벌기 위해 1학기~1년 정도 휴학을 하고 꼰작 일을 하고 있단다. 한 달에 80달러 정도를 받는다고. 이 나라 법정 최저임금이 115달러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 턱없이 못 미친다. 물가차이가 있다지만 그래도 종일 버스 문을 붙잡고 서서 먼지를 마시며 울퉁불퉁한 길을 가는데 너무 싸게 먹히는 것 같다.
야간 버스는 생각보다 조용하고 사람도 반 정도 밖에 차질 않았다. 옆옆 자리에 앉은 젊은 엄마는 3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그림처럼 앉아 있는데, 불편한 자리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참 잠을 잘 잔다. 무언가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좌석 아래 밀어넣었는데 슬쩍 보니 딜리에서 더 싼 음료수 팩이다. 왠지 친정 엄마 만나러 로팔에 왔는데 엄마가 바리바리 싸준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다.
시외 버스는 불편하지만, 당연히 타다 보면, 살다 보면 다 적응이 된다.
언젠가 한 번은, 6시에 예약을 했는데 정말 꽤 정확하게 5시 55분에 집 앞에 왔다고 전화가 와서 좀 놀랐다. 여기선 보통 예약한 시간 대비 플러스 마이너스 1~2시간 차이가 나는데, 이 정도면 아주아주 훌륭한 거다!
게다가 내가 버스를 타고 난 후 무려 30분 밖에 시내를 돌지 않고 바로 시내를 나섰다. 딜리에서는 길게는 3시간 까지도 버스가 다 찰 때까지 시내를 뺑글뺑글 도는 경우도 허다한데, 30분 정도면 아주 양호하다. 처음에는 이런 “다 찰 때까지 계속 돕니다” 시스템이 너무 어이 없고, 화도 나고 했는데 이제는 적응했다. 귀가 찢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의 스피커 소리도 “그래, 이 정도로 틀어야 기사 아저씨가 졸음 운전을 안하겠지” 싶게 오히려 안심이 될 정도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버스 안에서 피는 담배연기도 “그나마 앞에 있는 사람들이 피는 게 아니고, 뒤에 있는 사람들이 피어서 덜 넘어오네” 싶다. 하지만 솔직히 우리 사무실 차에 비해서 불편한 것은 당연한 사실! 깨끗하고 조용하고 담배 연기도 없고 안전하고 에어컨도 나오는 사무실 차와는 당연히 비교가 안 된다.
한편으로는 이런 순간이, 내가 여기에선 얼마나 편안하게 사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 입장에선 편안하게 사무실 운전사 아저씨가 운전해주는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일상적인 것인데, 가끔 이렇게 지역 버스를 타면 이곳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체험하게 된다. 안 그래도 좁은 버스내의 좌석도 없어서, 서서 가는 것은 물론, 버스 지붕 위와 옆에 매달리는 것도 빈번하다. 너무 당연한 일상이어서 여럿이 포개어져 가고, 몸이 닿는 일에 대해 딱히 불만을 제기하는 일도 없다. 닭과 기타 수많은 무수한 짐들과 함께 실려서 기약없이 계속 돌면서 가더라도, “일상”이기에 딱히 겉으로 항의를 제기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실 그렇게 해 봤자 대안이 없다. 비록 허름하고 열악하더라도 그나마 이런 버스의 수는 턱없이 부족하고 다른 교통 수단이 없다. 오랜만에 지역 버스에 구겨 앉아 가며 (하지만 이것도 여기 기준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기존에 해 왔던 대로 2자리를 한꺼번에 예약을 했다. 딜리까지 한 자리에 8달러, 두 자리면 16달러. 내가 자라온 환경과 익숙해져 있는 관습, 다행스럽게도 소득 정도의 모든 조건은 6~7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더 편히 갈 수 있으면 8달러는 기꺼이 지불 할 수 있으니깐… 외국인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생활 조건이 서로 당연히 다르다는 것이 먹먹할 때도 있다는 생각,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곳에 속하지 않고 돈을 더 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면서 동시에 살짝 죄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살아온 환경이 있기에, 여기에선 그냥 특별할 것 없는 보통의 버스 여행을 괜시리 존엄과 기본권 등등으로 연결시켜 괜히 서글프게 생각하는 내 “함정적 사고” 일 수 있다. 승객이 한 명 밖에 없어도 정시에 출발하는 깨끗하고 쾌적한 기차와 버스를 타다가, 이런 버스를 타며 느끼는 충격은 내가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느끼는 것이니깐 말이다.
사실 버스를 타면 나도, 현지주민들도, 모두모두 승객이라는 이유로 재미있을 때가 더 많다. 언제 한 번은 K와 딜리 갔다 오는 길에 평소 안면이 있는 찌투 아저씨네 버스를 다행히 예약했다.
여전히 온갖 짐들로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지만, 뒷좌석에 비하면 아주 상석인 운전기사아저씨 대각선 뒷편 좌석으로 배정이 되었다. (좌석별로 가격차이가 없음! 순전히 아저씨와의 친분이 얼마나 있는지, 얼마나 일찍 예약을 하는지에 좌우된다.) 바로 앞에 앉은 아주머니는 엄청 활발하고 수다스러운 분으로, 가족들끼리 같이 딜리를 갔다 오는 길인데 9월 중에 여동생의 결혼식 파티를 한다며 나와 K를 초대했다. 결혼식 파티에 쓸 온갖 식재료들을 수도에서 잔뜩 구입해서 오시는 길인가 보다.
앞뒤옆으로 아는 아줌마들이 앉아 계시니 역시 시끌시끌하고 재미나다. 서로 귤이나 빵을 권하기도 하면서 수다를 떨고, 내용은 이해 못 했지만 무언가 라디오 방송인지 녹음인지 같은 것을 듣고 아줌마들이 완전 빵 터지며 넘어가는 모습이 재미나서 나와 K도 같이 웃다 보니깐 시간이 훨씬 더 짧게 느껴진다. 게다가 간간히 밖에는 아니지만 찌투 아저씨의 “무심한 듯 시크한 유머”도 재미나다. 농담따먹기 하다가, 졸다가 가끔씩 길에서 생선구이 같은 걸 산다고 멈춰서 시끌시끌 하다보니 로팔에 도착했다. 탈 때와 마찬가지로 내려줄 때도 집집마다 앞이나 근처에 내려준다. (순서는 아저씨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지금 막 버스에서 만났건, 아니면 이미 얼굴 알고 있는 이웃이건, 긴 시간 버스를 타고 오면서 왠지 모를 동지감이 생기는 건 사실!
이런 건, 편한 사무실 차를 타고 다니면 모른다. 수다와 사람들의 온기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