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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싸 Oct 21. 2021

모던 쓰레기

'모리스 디페렌테' (다른 삶) 36

모리스 디페렌테 Moris Diferente. 동티모르의 2개 공용어 중 하나인 테툰어로 '다른 삶'이란 뜻이다.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 발리섬 아래쪽, 호주의 위쪽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근 5백 년에 가까운 식민지에서 21세기 초 독립한 나라로, 한국에는 상록수 부대 파견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곳은 내가 2013년부터 일하고 생활한 곳이자, 가족을 꾸린 곳이기도 하고, 서로 다른 삶들에 대해 무척 많이 생각하게 되는 곳이다. 낯선 땅, 다른 삶, 이상이 현실에 부딪치는 순간순간의 일들을 여기 기록한다. 


우리 단체가 로스팔로스에서 운영했던 라우템 주립도서관에는 중고등 학생 자원봉사자 그룹이 있었다. 한 30명 정도가 책정리도 하고, 공부도 하고, 쉬운 영어책을 현지어로 번역해 다른 이들도 읽을 수 있게 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했었다. 한 번은 이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행한, "아름답고 쓰레기 없는 로스팔로스"를 위한 환경 캠페인을 한 적이 있다.


본 바탕은 아름답고 깨끗한, 대규모 오염원이 없는 열대 섬나라 동티모르이지만, 주거지역 인근의 쓰레기 증가는 꽤 심한 수준이다. 아마도 과거엔 가정에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정도의 쓰레기만 감당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캔, 플라스틱 제품, 비닐 포장 제품 들이 들어오며 급격히 증가한 쓰레기 대비, 사람들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더딜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썩지 않는 쓰레기에 대한 의식이 약하고, 관련 교육은 물론, 쓰레기 처리나 재활용 시스템 역시 취약하기 그지 없으니깐 말이다. 

그 전날 한국에 계신 엄마와도 잠깐 카톡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한국에서도 쓰레기에 신경쓴 것이 종량제 하고 나서부터 아니냐, 그 전에 급격한 산업화 기간 동안은 그냥 나오는 대로 막 버리지 않았느냐, 하지만 그 산업화 이전, “옛날”엔 오히려 이런 것이 덜하지 않았을까 라고 엄마한테 이야기를 하니, 

엄마가 말씀하시길

“…플라스틱제품이 생겨나고부터 포장이 이루어지고부터 쓰레기가 너무 심해진 건 사실이지. 옛날에는 그냥 집에서 보자기 하나 들고 시장갔지. 그러면 신문지에다가 생선 싸주고, 그 외는 한꺼번에 대충 신문지로 포장했었지, 비닐봉투가 어디 있니… 소포장과 대포장, 스치로폴도 당연히 없었고. 

음식물 찌꺼기는 개한테 줬지. 닭도 얻어 먹고. 

엄마 살던 집은 주택이었으니깐, 뭐 그때는 아파트도 아직 많이 없었지, 과일 껍질도 안 버리고 땅에 묻어 비료로 사용하고, 세제 안 쓰고, 샴푸도 많이 못 쓰고 안 썼지. 짚으로, 수세미로 설거지하고. 기와지붕 가루(?!)하고 연탄 타고 남은 재로 제사때 쓰는 그릇 닦으면 윤이 얼마나 반지르르 났는지 몰라.” 라고 이야기를 하셨다. 

(울 엄마는 53년 서울생!)


동티모르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 직원분들이 하는 것을 보면, 주위 나뭇가지나 나뭇잎, 돌 같은 자연물을 자연스럽게 적시적소에 활용하고, 음식쓰레기는 돼지나 개에게 자연스럽게 가게 되고 (오히려 음식쓰레기 대비, 동물들이 항상 더 많다!)… 전통 생활양식적 측면에서 보면 자연분해되지 않는 쓰레기는 거의 없다. 모든 쓰임새와 버림이 한 사이클 안에서 자연스럽게 완결이 되는 편이다. 

문제가 되는 쓰레기들은 다 수입산 - 일테면 산업화의 산물이다. 코카콜라 캔, 플라스틱 병, 과자 봉지 등등. 모던 쓰레기!

사람들의 사고나 생활방식은 아직 전통적인 쪽인데, 나오는 쓰레기들은 어느샌가 점점 더 늘어나니 자연스럽게 불균형이 온다. 새로 생기게 된 쓰레기들은, 이전의 쓰레기들처럼 자연스럽게 환경으로 돌아가지 않는 다는 것, 특별히 의식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이 쓰레기들이 환경을 좀먹어 버린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아야 하는데… 노력과 시간과 돈을 들여 회복하게 되는 순간이 되기 전에 그렇게 되어야 하는데...

흔히 산업화 단계의 나라들이 그렇듯 당장의 경제성장과 배고픔의 해결이 우선이 되어, “쓰레기”는 뒤로 밀리는 듯하다. 물론 정부나 여론은 쓰레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만, 당장 시급하게 여겨 무언가를 급하게 하는 듯한 태도는 없다. 우리나라도 월드컵 준비할 때가 되어서야 난지도를 공원으로 바꾼다 어쩐다 했으니, 이런 식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것은 비슷한 듯. 안타깝다. 이런 중요한 문제들이 당장의 '눈에 보이는 경제적 성장?!'에 가려 뒤로 밀리고, 또 후회하고, 다시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깨달음이 공유되지 않는 걸까? 아니, 경험은 공유될지 모르지만, 그 절실함은 공유가 되지 않는 건지도...


수도 딜리 만큼은 아니지만 로스팔로스 역시 쓰레기가 많다. 도서관에서 중심가로 이어지는 길과 주거지까지 구석구석 쓰레기 천지! 여기를 따라 걸으며 "깨끗한 로스팔로스" 등의 구호를 함께 외치고 같이 쓰레기를 줍는 것이 환경캠페인의 주 내용. 한국에선 진부할 정도로 흔하지만, 현지에서는 가히 "파격적이고 전례 없는" 행사다. 우리가 그 전해에 1회 개최한 것이 최초이자 유일한 경우. 쓰레기에 대해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니깐 말이다. 계속 해 달라는 주 정부, 인터뷰를 요청했었던 지역 라디오 등 외부의 긍정적 반응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참여한 학생들이 먼저 나서 “올해도 합시다!”라고 적극성을 보여준 것이 제일 반가운 일이다. 

작년에는 드러내놓고 공공 장소에서 쓰레기를 줍는다는 것에 대해 마냥 낯설어 하고, 심지어 창피하다고 한 친구들이, 올해는 먼저 나서서 계속 행사를 재촉했다. 현지인 직원 E가 주간회의에서 봉사자그룹이 쓰레기 캠페인 다시 안 하냐고 한다라고 이야기 한 것이 두 세번 정도 되니 말이다. 자신이 속한 커뮤니티의 문제에 대해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거나 개선을 위해 함께 노력을 하려는 것은 꽤 성숙한 시민의식의 표출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어린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기특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일부는 그냥 다같이 걸으며 구호를 외치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개구쟁이들도 있고, 캠페인 단체 티셔츠 받는 데 관심많은 친구들도 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다들 시작하면 진지하게 열심히 쓰레기 주으니깐, 그것으로 충분하고도 남는다.

캠페인에 앞서 전날엔 환경교육을 간단히 하고 (S 간사가 준비를 진짜 잘 했다!), 오후 3시 경에 도서관에서 모여 다같이 티셔츠를 입고 나섰다. 도서관서 3분 정도 거리의 다리쪽으로 가서 가게들이 몰려 있는 중심가쪽을 걸으며 쓰레기를 주웠다. 아이들이 즐겨 먹는 조그만한 비닐봉지 포장의 과자나 사탕의 껍데기가 너무 많아, 치우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그 전해에는 우리가 돈 주고 빌린 쓰레기 트럭을, 올해는 주 환경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고 환경공무원 분들도 같이 따라 오셔서 든든했다. 한 시간 가량 쓰레기를 줍고 짧게 으샤으샤를 한 후, 헤어졌다. 몸은 피곤하지만 간만에 이런 기분 괜찮다. 


시끌시끌 건강한 학생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빈곤의 포르노그라피”, “일반화는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아젠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실상 현지의 많은 학교들이 처한 상황은 열악하다. 비가 오면 지붕으로, 바닥으로 흙탕물이 들어오고, 전기는 당연히 들어오지 않고, 멀쩡한 책걸상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학생들의 영양상태나 가정 형편 역시 좋지 않은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이 학생들의 모습에선 흔히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앙상한 몸과 퀭한 눈의 무표정한” 모습만 있지 않다. 객관적으로 어려운 상황도 분명히 있지만, 나름대로 주어진 상황에서 잘 해 나가려는 적극성과 열정, 다른 사람들과 스스로를 돕고자 하는 건강한 모습 역시 생생하게 존재한다.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가진 시끌벅적함, 감수성, 에너지가 똑같이 존재한다.

불쌍해 보이는 (그리고 사실상 불쌍한 면도 있는) 상황의 타인에 대한 연민은 분명 소중하고 숭고한 감정이지만, 자칫 그로 인해 그 대상 자체가 지나치게 수동적 대상으로 타자화 된다면, 결국에는 다소 일방적이고 정형화된 방식으로밖에 소통할 수 없을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하던 간에, “에고, 불쌍해”라고 바라보게 된다면 그게 다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나와 타자가 똑같은 인격체가 아닌, “상-하”, 혹은 “베푸는 자와 받는 자”로 고착화 되어 버리는 것, 나눔이 일방적인 자기만족으로만 그치는 것을 경계해야지만, 각자가 가진 고유의 개성과 역량이 그저 “불쌍함”으로만 치환될 수 있는 함정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일방적인 동정과 연민을 떠나, 보편적인 인류애와 건강한 시민사회 가치를 함께 추구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 그런 차원으로 기부자들이나 기부 받는 사람들이 수렴되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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